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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 221-2 : 이용태(1884부임-1885이임) : 내부대신까지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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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태 [記事] : 한국사료 총서/ 매천야록(국역) / 『梅泉野錄』 제3권 / 光武 6년 壬寅(1902년) / 28. 嚴妃 皇后 책봉 간청 / 宰臣 韓聖根과 沈相漢이 搢紳과 章甫 수백 명을 인솔하고 대궐 앞에 부복하여 嚴妃의 황후 책봉을 간청하고 또 金炳翊, 徐相祖, 金永穆, 趙秉弼, 鄭洛鎔, 趙鍾弼, 李乾夏, 李根秀, 金世基, 金學洙, 金嘉鎭, 李容泰, 鄭世源, 徐公淳, 金晩秀, 金昇圭, 李冕相,丁觀燮, 鄭寅學, 趙鼎九, 金裕成, 李致榮, 鄭寅昇, 元世洵, 具永祚, 李南熙, 李用漢, 金在殷, 具鍾書, 李敏燮, 李鳳來 등이 紳士 400여 명을 거느리고 그 뒤를 계속하여 간청하고, 또 전남의 신사 韓信敎 등이 그 뒤를 이어 간청하였다. 그리고 3도 유생들이 그 뒤를 이어 간청하고, 또 李晩植 등이 8도 유생들과 함께 萬人疏廳을 설치하였다. ...(www.history.go.kr 2008)
이용태 [記事] : 한국사료 총서/ 매천야록(국역) / 『梅泉野錄』 제4권 / 光武 8년 甲辰(1904년) ① / 31. 내부대신 이도재를 면직 / 내부대신 李道宰를 면직하고 李容泰를 그의 대직으로 임명하였다. / 이도재는 임금께 상주하여 군수 19명을 임명하게 하고 뇌물과 청탁을 거절하여 인재를 발탁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公心에 감복하였다. / 그러나 이때 趙秉式은 그를 질투하여, 그가 奏本을 지을 때 정부에서 짓지 않고 私第에서 작성한 것은 행정의 격식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폭로성 상소를 하므로 이도재는 강력히 사직을 간청하였다. / 그리고 이용태는 옆 사람의 도움을 받아 진출하였으므로 물의를 빚어 사람들은 그를 비루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尹昌根, 朴恒來 등은 이도재가 발탁한 사람으로, 그들은 모두 관리의 재질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www.history.go.kr 2008)
이용태 [記事] : 한국사료 총서/ 매천야록(국역) / 『梅泉野錄』 제4권 / 光武 8년 甲辰(1904년) ③ / 14. 김가진, 이용태 등을 대신에 임명 / 8월, 金嘉鎭을 법부대신, 李容泰를 내부대신으로 임명하였다.(www.history.go.kr 2008)
이용태 [記事] : 한국사료 총서/ 매천야록(국역) / 『梅泉野錄』 제4권 / 光武 8년 甲辰(1904년) ④ / 17. 일본의 한국경찰권 탈취 / 參政 申箕善과 내부대신 李容泰 등을 면직하고, 軍事權과 警察權 등의 條例도 반포하였다. 그리고 24일, 一進會는 정부에 개혁을 요구하므로 정부는 경찰과 官吏를 동원하여 그들을 탄압하자 일본인들도 병력을 동원하여 비상사태가 발생할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 이때 어떤 일진회 회원이 돌을 던져 일본인 한 사람을 다치게 하자 그들은 우리 경찰의 잘못으로 간주하여 대대장 이하 장교 6명, 士卒 7명을 포박하라는 令을 전하고 그 다음날 林權助, 長谷川好道등은 담판을 하여 신기선 등의 관직을 遞職하고, 그 후 수일 만에 그들은 또 우리 정부를 협박하여 우리 나라 경찰력은 治安을 유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방해가 되므로 지금부터 전국의 경찰권은 일본의 군부 및 관리가 장악한다고 하였다. / 그리고 이때 임권조 등은 牒文을 지어 국내 및 각국 공사에게 布告하기를, 지금부터는 한국인과 외국인을 막론하고 일본의 군부 및 경찰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하면서 19개 조항을 반포하고 이를 범한 사람에게는 모두 일본 사령관이 직접 형사처분을 한다고 하였다. 그중 그 條規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第4條 黨을 結成하여 일본에 反抗하거나 혹 일본군에 抵抗하는 자. / 第15條 회사를 결성하거나 혹 신문, 잡지, 광고 및 기타 수단으로 치안질서를 紊亂하게 하는 자. / 第17條 군사령관의 명령을 어기는 자. / 이것만 보아도 그 나머지는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www.history.go.kr 2008)
이용태 [記事] : 한국사료 총서/ 매천야록(국역) / 『梅泉野錄』 제4권 / 光武 9년 乙巳(1905년) ⑤ / 7. 批答 / 어제의 비답에 양해를 구하였으니 이렇게 확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잘 商量하여 처분할 것이니 卿 등은 양해하시고 모두 물러가기 바랍니다. / 이때 諸臣들도 전후로 閔泳奎, 趙秉式, 李漢英, 丁明燮, 洪祐晳, 安鏞和, 李容泰, 朴箕陽, 金完秀, 朴齊璜, 李載克, 尹秉□, 洪淳馨, 李根秀, 李渭來, 姜允熙, 崔在學, 李明翊, 李鍾泰, 尹斗炳, 鄭鴻錫, 高鼎柱, 申性均, 姜遠馨, 安秉璜 등이 서로 상소를 하였지만 고종은 趙秉世와 같은 의견이 있는 사람에게만 비답을 내려 주었다. / 이때 각국 공사들은 우리 나라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판단된 데다가 그들은 또 일본의 부탁을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후한 뇌물을 주었으므로 그들은 모두 중립을 지키어 가부를 결정하지 않았고, 또 그들이 비록 그 조약을 취소시키려고 하더라도 이미 형세는 미칠 수가 없었다. / 그리고 諸賊들에 대해서도 처형을 하려면 처형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일본이 두려워 감히 요동하지 못하였으며, 상소문이 비록 公車 관공서의 車. 혹은 兵車이기도 하며, 漢代의 官署名이기도 하다. 에 가득하더라도 아무 이익이 없었다.(www.history.go.kr 2008)
이용태 [記事] : 한국사료 총서/ 매천야록(국역) / 『梅泉野錄』 제5권 / 光武 11년 丁未(1907년) ① / 12. 前注書 羅寅永 등의 謀誅五賊 / 前注書 羅寅永, 前主事 吳基鎬와 金寅植 등이 5적을 살해하려다가 미수에 그쳐 평리원에 자수하였다. 이때 나인영 등은 폭약 2櫃를 은밀히 가지고 있었다. / ... 李容泰와 閔衡植 등도 체포하였다. 그들도 나인영, 오기호 등에게 포섭된 후 거액을 투자하여 그들의 운동을 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용태의 집에서는 私鑄한 병기와 화폐가 발견되어 그것이 罪案에 첨가되었으나 민형식은 입을 다물고 굴복하지 않고 있다가 酷刑을 당하였고, 李沂는 그 삼엄한 분위기를 보고 사실을 실토하여 모든 문서가 그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그 죄상이 명백히 밝혀졌다. 박용화를 처형한 것은 다른 사유가 있었던 것이며 나인영과 오기호 등의 사건에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법사에서 처음에는 그들에게 살인을 음모한 죄로 처형하려 하였으나 민형식은 閔泳徽의 양자이므로 민영휘는 많은 돈을 뿌리며 안팎으로 주선하여 그 사건이 조금 풀리었다. / 그 후 얼마 안되어 朴泳孝가 귀국하자 그들을 국사범으로 바꾸어 그들은 모두 처형되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에 李沂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떨어진 상복을 입고 서울을 왔었다. 이때 이지용이 그를 추천하여 그가 사범교관이 된 후에도 그를 위해 봉급과 식비를 도와주었으며, 나인영은 날마다 박제순의 집에 가서 관직 한자리를 제수해 달라고 하였으나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이런 일을 시작하였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논하면서 매우 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하였다. 이 사건은 尹柱瓚, 李光秀 이하 10여 명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그들은 모두 호남 사람으로 주모자인 李沂 및 羅寅永 등과 한고향 사람이기 때문이었다.(www.history.go.kr 2008)
이용태 [記事] : 한국사료 총서/ 매천야록(국역) / 『梅泉野錄』 제5권 / 光武 11년 丁未(1907년) ② / 26. 閔宗植, 李容泰 등의 유배 / 閔宗植, 閔衡植, 李容泰, 羅寅永, 吳基鎬, 金寅植, 李沂 등은 年限의 차이를 두어 珍島 등지로 유배하였다 그리고 李容珪, 朴潤植, 金德鎭, 郭漢一, 黃英秀, 鄭在鎬 등은 智島로, 朴在洪, 曺圭顯, 梁文淳 등은 珍島로 유배하였다. 이들은 모두 終身에 한하였다. 그리고 閔衡植, 李奭鍾 등은 鐵島로 10년, 李容泰, 金東弼, 康相元, 池八文, 朴鍾燮, 金京善, 黃文淑, 黃聖周, 李京辰, 趙化春, 羅寅永, 朴斗杓 등은 智島로 10년, 李承大, 崔翼軫, 徐彰輔, 李光秀, 尹忠夏, 金永采, 崔東植, 權在重 등은 진도로 10년, 鄭寅國, 李沂 등은 진도로 7년, 尹柱瓚, 吳基鎬, 金寅植, 徐廷禧 등은 진도로 5년, 金德俊, 李完秀, 車正午, 李承唐, 李常學 등은 智島로 5년 동안 유배되었다. 이때 李容珪 등 6명은 민종식의 일당으로 연좌되고 박재홍 등 3명은 양한규의 일당에 연좌되었으며, 이석종 이하 30여 명은 모두 민형식과 함께 권종현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연좌되었다. / 이때 李完用 등은 민종식을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趙重應이 강력히 견제하여 사형을 감면하자는 여론이 일어났다. 그리고 李鍾元이란 사람은 민종식의 하인으로, 그는 시종 민종식을 호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며 조석으로 밥 한 그릇씩을 들고 옥문 밖에서 울며 민종식을 부르므로,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의롭게 여겼다.(www.history.go.kr 2008)
이용태 [記事] : 한국사료 총서/ 기려수필 / 1895년-1896년 / 李?(三) 乙未洪州義兵 / 李?(三) / 李? / 東學亂時의上疏 / 乙未事變 / 李勝宇의反動 / 乙巳上疏 / 拘留 / 李?字舜命, 號復庵, 延安人, 文康公 石亨, 以文章顯, 黙齋 忠定公 貴, 西峯 忠靖 時昉, 以忠義 勳業, 父子相繼, 爲仁孝兩朝名臣, ?乃其嗣, 哲廟庚戌 (元年), 生于結城之花山, 長出爲世, 父氷庫別檢, 祖謙后, 始有娠, 金孺人, 有胎敎, 及生, 容貌淸雅, 才德聰敏, 至?而乃能言, 七歲讀周興嗣 千字文, 書揭孝當竭力, 忠則盡命, 八字于壁, 又有寒軒母坐吾不安之句, / .../ 內部大臣 李容泰奏曰, 李某孤忠可獎, 除安州郡守, 促命赴, 不就, 乙巳 (光武九年) 倭賊, 勒約五條, 於是, 閔公泳煥․趙公秉世死之, ?聞報號痛, 遂?疾上疏略曰, 噫彼倭賊, 陰狡奸?, 一變於甲申而有劫駕之厄, 再變於甲午而有犯闕之禍, 三變於乙未而有弑逆勒削之擧, 四變而有甲辰借地之請, 馴致今日而保護之說, 肆行則變已極矣, 國將亡矣, 可勝痛哉, 古今天下, 豈有不亡之國, 不死之人, 惟我聖明, 以晉敬?, 宋建炎爲深恥, 必以大明毅皇爲法, 群下則以長樂老許平仲爲深恥必以文天祥之燕獄爲歸宿, 則亦可以歸拜於祖宗在天之靈而永有辭於天下萬世矣, 又尾陳小貼子, 論五賊調印之罪, 疏入, 爲倭所執, 拘警務獄, 補助員渡邊問曰, 諸大臣皆謂之逆何也, ??聲叱曰, 引賊賣國, 非逆而何, 相詰良久,...(www.history.go.kr 2008)
이용태 [記事] : 한국사료 총서/ 대한계년사 / 大韓季年史卷之二 高宗皇帝 / 三十一年 甲午 / 古阜民亂 / 東學黨魁首全琫? / 東學黨四大名義 / 距京城六百里 郡守 趙秉甲, 剝割尤甚, 民不勝怨恨, 結黨爲擾, 命以長興 屬全羅道距京城八百九十里 府使 李容泰爲按?使, 使之査?, 容泰玩?時日, 又欲乘勢攘奪民財, 反滋致騷, 於是, 鄕民推前鹿島 屬興陽 萬戶 爲魁, 遂於三月二十五日與東學徒合衆至五六萬, 首蒙白巾, 手執黃旗, 一曰不殺人不殺物, 二曰忠孝雙全濟世安民, 三曰逐滅倭夷澄淸聖道, 四曰驅兵入京盡滅權貴, 大振紀綱立定名分, 以從聖訓。 ...(www.history.go.kr 2008)
이용태 [記事] : 한국사료 총서/ 대한계년사 / 大韓季年史卷之六 高宗皇帝 / 光武六年 壬寅 / 十一月 , 議政 不果。 / 時容翊爲內藏院卿及臨時署理度支部大臣, 以?克媚奧爲事, 朝野怨嫉之, 會容翊偶語及嚴貴妃曰貴妃貴妃云乎, 則是乃唐明皇之楊貴妃歟, 容善等聞之, 欲以此?容翊罪而殺之, 二十七日 舊曆十月二十八日 夜, 容善與參政 金聲根․學部大臣 閔泳韶․外部大臣 趙秉式․農商工部大臣 閔種黙․宮內部大臣臨時署理尹定求․?政 權在衡․法部大臣 李載克․內部大臣 金疇鉉․軍部大臣臨時署理李根澤․參? 李容泰等, 上討逆奏, 曰臣等卽伏見外部大臣臣趙秉式所傳, 因前漢城府判尹 嚴柱益, 嚴貴妃之三從孫 警衛院摠務局長 金永振 嚴貴妃之姨從弟 所告, 則以爲內藏院卿 李容翊, 以人臣不敢言之句語, 凌逼莫嚴之地, 且比擬不倫, 凶獰無憚云, 此賊之亂言干犯情節, 極爲切害, 凶逆不道?宜聲討云矣,...(www.history.go.kr 2008)
이용태 [記事] : 한국사료 총서/ 대한계년사 / 大韓季年史卷之七 高宗皇帝 / 光武八年 甲辰 / 光武八年甲辰 八月/ ... 二十八日內部大臣 李容泰電訓于十三道觀察使曰所謂會民, 今旣犯法, 飛飭管下各郡, 揭示坊曲, ?各自新, 防守大路及要地, 嚴禁聚黨上京, 如有頑悖不悛者, 捉囚査報, 以爲法堪 (勘) ,...(www.history.go.kr 2008)
이용태 [記事] : 한국사료 총서/ 대한계년사 / 大韓季年史卷之八 高宗皇帝/純宗皇帝 / 光武十一年 丁未(至八月) / 國債報償金 / 十一年 一月 , 京鄕士民集。/ 再謀擧事何如, 永采心然之, 遂與李承大․呂圭冕, 共赴吉善家, 密謀再圖, 永采因承大而交吉善, 故不疑之 吉善告于齊純輩, 永采․承大同被拿, 李容泰․鄭寅國․閔衡植․金東弼․崔東植․徐廷禧․崔翼軫․李奭鍾․池八文․朴變鍾․金敬善․黃文叔․黃聖周․李京辰․趙化春․李鍾學․崔相五․朴應七․黃景五․全德俊 池八文以下皆自鄕應募者 皆被逮, 其他疑似而被拘者甚多, ...(www.history.go.k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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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