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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1,433 : 문종대왕 태실...문학과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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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대왕 태실과 사도세자 태실(醴泉郡, 朝鮮王室 胎室遺蹟 復元 硏究用役 中間報告會 開催 : 上里面 鳴鳳里 一圓, 새로운 文化遺産으로 活用) [記事] : 예천군은 2015년 4월 2일 오후 2시 군청 영상회의실에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등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명봉리 조선왕실 태실유적 복원 기본설계 및 종합정비계획 수립』연구용역 중간보고회를 가졌다. 왕실의 태실이란 왕과 왕비를 비롯한 그 자손들의 태를 묻은 시설물이며, 태실이 조성된 산을 태봉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태를 묻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풍습이지만 왕실의 태실조성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문화로 왕과 왕비의 태실이 국내 27개소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봉사 북쪽에 위치한 문종과 사도세자(추증 장조)의 태실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문화재이지만 발굴을 통한 석물 수습과 고증을 통해 복원 가능한 문화재로 판단하고 있으며 주산에 2명의 왕의 태실이 봉안된 특이한 태실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태실을 왕의 격식에 따라 조성하는 등 효를 실천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충효의 고장인 예천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더 부각시키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예천군 관계자는 “중간보고회에서 나온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ㆍ반영하여 ‘명봉리 조선왕실 태실유적’에 대한 종합정비 방안을 마련하고 ‘생명’과 ‘효’를 연계한 새로운 문화유산으로 적극 활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醴泉뉴스 2015년 04월 02일)
문종대왕태실비(文宗大王胎室 碑) [記事] : 연대 1735년(영조11년) / 유형/재질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시도지정문화재 - 시도유형문화재 제 187호(경상북도) / 크기 높이 128cm, 너비 56cm, 두께 26cm / 출토지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명봉사 / 소재지 (한국)성균관대학교 박물관-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3가 성균관대학교 / 서체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미상 / 미상 / 미상 / 이 비는 1735년(영조 11년) 경상북도 예천군 명봉사에 건립된 문종대왕태실비(文宗大王胎室碑)이다. / 태실이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두는 돌로 만든 방으로, 태실비는 태실에 태를 모신 것을 기념하는 비이다. 이 비는 문종대왕의 태를 모신 후 세운 비로, 명봉사 절내에 사적비와 나란히 서 있다. 원래는 절 뒤편 산기슭에 있었으나 일제 때 태실을 발굴해간 뒤, 명봉사의 스님들에 의해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거북받침은 머리가 용머리화 되어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다. 머릿돌은 네모난 형태로, 앞면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 있는 장면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거북받침의 표현이 투박하긴 하나, 짜임새와 조각솜씨는 섬세하다. /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 (단행본)조동원, 1982,『한국금석문대계』3, 원광대학교출판국(韓國金石文綜合映像情報시스템 2007)
문종대왕태실비(자료=예천군) : 예천신문 | 2010.04.02. / 문종대왕태실비(유형문화재 제187호 1984.12.29 지정)/ 소재지 :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501/ 소유자 : 명봉사(관리자:명봉사)/ 자세한 설명 : 상리면 명봉사 경내에 있으며 영조 11년(1735년)에 조성된 이비는 화강암으로 만든 전체높이가 2.46m, 비신높이 1.13m, 폭 0.57m, 투께 0.25m로 조성되었으며 문종의 태를 안치하고 세운 비석이다. 원래 대웅전 뒤편 산봉우리에 있었으나 일제 때 이 자리로 옮긴 것이다. 이 비는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올려놓은 일반형으로 지대석과 귀부가 한 돌로 되어 있다. 귀두는 용머리같이 하여 입에 어의주를 물고 있다. 이수는 방형으로 전면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 있는 것을 양각했는데 몸체에 비하여 귀부의 처리기법이 둔중해 보이나 전체적인 구성과 조각 솜씨는 매우 섬세하다. 비신 앞면에 「문종대왕 태실」뒷면에 「숭정기원후 일백팔을묘」라 음각한 비명으로 보아 이 비의 건립연대가 영조 11년(1735)임을 알 수 있다.(daum 2010)
문종대왕 태실비 : →명봉사 문종대왕 태실비
문중입의(門中立議) [古書] : 선조(先祖) 묘소를 지키는 것과 관련된 책으로, 예천군 정양수(鄭亮秀) 소장본을 촬영한 마이크로필름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청구기호 MF A지수 107)되어 있다.
문중입의(門中立議) [古文書] : 예천 지방 소장본을 촬영한 마이크로필름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문천바우 [바위] : 상리면 용두리(龍頭里) 안골 깊숙히 문천바우골에 있는 바위로, 문처럼 생겼다.
문천바우골 [골] : 상리면 용두리 안골 뒷편 문천바우가 있는 골짜기이다
문체론적 작품고(文體論的 作品考 : 東仁 小說의 境遇) [論文] : 예천 출신인 이동희(李東熙, 1932- , 嶺南大 敎授)의 논문으로, 한국어문학회에서 1972년에 발행한 <어문학> 27권 141-153쪽(13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는, 1) 서언, 2) 문체 인상, 3) 문체 분석, 4) 결언이다.(keris 2003)
문촌(文村) [마을] : 용문면 원류리(院流里) 허리골 남쪽 큰길 가에 있는 마을로, 1630년 경에 감천 문씨(甘泉文氏)가 개척하여 살다가 떠나가고 각성촌(各姓村)이다. 7가구 32명(1980)이 살다가, 6가구 13명(1992) 중 경주 崔 2가구 등이 살고 있다.
문촌(文村) : 허리골 남쪽 큰길가에 있는 마을로,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에 甘泉 文氏가 開拓하여 文氏의 마을이란 뜻이라고 하나 지금은 모두 떠나고 各性村이 되었다.(龍門面홈페이지 2013)
문촌 : 문촌/ (지번) 경북 예천군 용문면 원류리/ 카테고리 지명(daum 2017)
문촌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원류리 [院流里, Wollyu-ri]/ 2016.07.22./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에 있는 리(里)이다. 마을로는 새터, 팔지기, 허릿골, 문촌, 민경지가 있다. 새터는 원류리의 중심.../ blog.naver.com/hmi0419/ 세상의 모든 이야기..(daum 2017)
문촌 : 용문면 지명유래/ 2011.12.22./ 허릿골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 문촌(문村) ▫ 허리골 남쪽 큰길가에 있는 마을로 지금... 변음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용문면이 流里面과 諸古面으로 되어 있을.../ blog.daum.net/ibjc115/ 새천년 희망의 땅 ..(daum 2017)
문촌 : 감로루 이야기/ 2014.09.07./ 용문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3km 정도 떨어져 있다... 원류리라 하고, 예천군 용문면에 편입되었다. 원류리는 ‘새터’, ‘팔적’, ‘허리골’, ‘문촌’, ‘신원’ 등의 자연.../ cafe.daum.net/redfox121... 딸에게 알려 ..(daum 2017)
문치 : →민트리고개, →밑트릿재
문치고개 : →민트리재
문턱고개 [고개] : 감천면 유리 유동역(幽洞驛) 서북쪽에 있는 고개로, 유리(酉里)에서 돈산리(敦山里) 돈닷으로 넘어간다.
문파집(文坡集) [冊] : 용문면 대제리 큰맛질 함양 박씨 집안에 소장되어 있는 문파 박면진의 시문집으로, 목판본이다.(금당ㆍ맛질의 역사적 위상 2003)
문필바우(文筆岩), 문장바우(文章岩) [바위] : 상리면 고항리(古項里) 문곡 뒷편에 있는 바위로, 뾰족하게 붓처럼 생겼다.
문필봉 : →태봉산
문학(文學) [冊] : 예천 출신인 조동일(趙東一, 1939- , 서울大 敎授)의 저서로, 201 (64)쪽, 29cm, 서울 서울대학교에서 출판한 <한국학연구총서> 1권에 수록되어 있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서울대(중앙)이다.(keris 2003)
문학과 언어(文學과 言語) [冊] : 한림전문대학 어문연구실의 편저로, 학문사에서 1998년 2월 15일에 발행하였다. 228페이지에 “‘금당 맛질 반서울’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예천 금당실과 마찔의 衣冠文物이 서울 수준 버금간다는 말이다. 따라서 금...”이 수록되어 있다.(http//book.daum.net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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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