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유래
- 본래 용궁군(龍宮郡) 예하면(內下面) 지역으로 예천군(醴泉郡) 지역과 구별하기 위하여 단위 명칭이 동(洞)이 아닌 리(里)이며 고려시대(高麗時代)에 교통이 편리한 곳에 역(驛)을 두었는데 당시 지보(知保)를 지보(智保)로 표시한 대목이 보이며 수륙교통의 요충지인 지보리(知保里)는 면행정(面行政)의 중심지(中心地)였으며 태을산(太乙山) 밑에 있는 동래정씨제사(東來鄭氏劑舍)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지보암(知保庵)이며 1914년 면(面)이 통합될 시 이의 이름을 따서 지보면(知保面)으로 명명된 듯 함.
소화리 所華里
- 본디 용궁현(龍宮縣) 예하면(內下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합(廢合)으로 소동(所洞), 배곡(白谷), 동막(東幕), 외방화(外芳華), 덕현(德峴)을 병합(倂合)하여 소동(所洞)과 외방화(外芳華)의 이름을 아울러 소화리(所華里)라고 이름 붙였다.
- 밭들, 전평(田坪), 외방화(外芳華)
1동막고개와 가막수리의 중간지점인 남향 마을로서 만화리 방화(芳華) 바깥쪽 밭이 많은 들의 뜻으로 전평(田坪) 또는 외방화(外芳華)하며, 만화리 한골에 살던 공주이씨(公州李氏) 일부가 200여년 전 농토따라 세거한 후 지금은 50여가구 중 공주이씨(公州李氏) 외에도 함녕김씨(咸寧金氏)도 산다.
- 동막고개(東幕)
30여 가구의 남양홍씨(南陽洪氏) 집성촌이다. 옛날 주막거리에서 술을 팔던 구로파(具老婆)가 양지 바른 이곳에 술청을 차리니 술맛이 하도 좋아서 동쪽 주막이 있는 고개란 뜻으로 동막고개가 되었다고 하며, 이 고개마루에서 빗방울이 남(南)으로 떨어지면 낙동강(洛東江)으로, 북쪽에 떨어지면 내성천(乃城川)으로 흘러서 삼강(三江)에 가서야 상봉한다.
- 주막거리, 수동(壽洞)
삼밭나드리(麻田)에서 서울나들이(京津)로 가는 중간지점이다. 예로부터 행인이 끊이지 않아 행인들이 쉬어 가게 하기 위한 주막이 있었다고 하여 주막거리다. 현재는 면사무소와 초등학교와 지서가 있어 지보면(知保面)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이곳 물맛이 좋고 술맛도 좋아서 피로가 쉬 풀리므로 오래 살수 있다는 뜻으로 수동(壽洞)이라 불린다.
- 배골(舟室, 舟谷, 所洞, 素洞)
예전 용궁향안(龍宮鄕案)에 영양남씨조(英陽南氏條) 밑에 주실(舟室)로 표기되어 있으며, 농산(聾汕) 남상진(南相鎭)의 주실팔경서(舟室八景序)에 마을이 주실(舟室)로 이름하니 무엇으로 그 실(實)을 알 것인가? 그 지형이 유수(幽燧)하여 남(南)으로 장강(長江)이 둘러 있고 북(北)으로는 높은 산(山)이 팔장을 끼고 그 가운데 있는 마을을 감싸는 듯하여, 흡사 넓고 푸른 물가에 바람으로 노를 삼고 물결로 돛대 삼는 듯하니, 예전 사람이 이런 것으로 이름짓지 않았겠는가 라고 했다. 이곳은 영양남씨(英陽南氏) 세거지(世居地)이다. 이조(李朝) 인조(仁祖) 때 남상진(南相鎭)(1607~1665)이 본시 안동군(安東郡) 풍산읍(豊山邑) 신안(新安)에 살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1636년)의 치욕(恥辱)을 보고 과거 보는 일을 폐(廢)하고 이곳 국사봉(國士峰) 아래 초당(草堂)을 짓고 채미가(採薇歌)를 지어서 벽에다 부쳤는데 이 초당(草堂)의 이름은 병정사(丙丁舍)라 하였다. 舟室(배골)이 백곡(白谷)으로 소동(素洞)으로 변(變)하였음은 배 백 휠소(素)라 하여 모두 백(白)으로 집약이 됐으며, 소동(所洞)은 소(素)의 오기(誤記)인 듯하며, 배(梨)를 연상하였음은 비약(飛躍)이다. 남상진(南相鎭)을 세상 사람은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불렀다. 마을 남(南)쪽 시장(市場)으로 뻗은 등을 뱃등이라고도 한다.
- 새터(新基)
나부산(羅浮山) 남쪽 아래 있는 아담하고 양지 바른 촌락이다. 호수(戶數)는 불과 20호의 작은 마을이나 공주이씨(公州李氏)의 세거지(世居地)이다. 선조(宣祖) 때 李敬(이경)(1568~ ? ) 자(字)는 국봉(國奉)이요, 호(號)를 나암(羅巖), 관(官)은 부호군(副護軍)이고, 팔대조(八代祖) 사봉(沙峰) 명덕(明德)은 시(諡) 공숙(恭肅)이니 조선개국명신(朝鮮開國名臣)이요, 오대조(五代祖)는 진(畛)이니 임피현형(臨陂縣令)으로 단종(端宗) 손위(遜位)에 이어 군량(群良)이 취륙(就戮)함을 보고 기관(棄官) 남하하여 영천(榮川)에 정착하였는데, 유자(有子) 오인(五人)으로 끝에 아들 말손(末孫)은 선입(先入) 방화(芳華)하고, 사내(四男) 종손(從孫)의 현손(玄孫) 칙(則) 공(公)이 이곳에 비로소 입항(入鄕)하여 새로 기지(基地)를 잡았으므로 샛터 또는 신기(新基)라 하였다. 임란당시(壬亂當時)는 공(公)의 나이 25세이니 그 뒤가 아닌가 싶다. 공(公)은 나부산(羅浮山) 아래 산다 하여 나암(羅巖)으로 호(號)를 삼고 여기에 몇 간 집을 지어 나암정(羅巖亭)이라 하였다.
- 덧재, 덕현(德峴), 가현(加峴)
안백골 남서쪽 덧재고개 밖에 위치한 마을이며 각성촌이다. 동쪽으로 재궁산이 높이 솟았고, 남(南)으로는 낙동강(洛東江)이 흘러 명당이라고 하며, 덧재고개 밖에 새로 생긴 마을 터가 흡사 덧붙여진 고개마루처럼 여겨지므로 가현(加峴)이라고도 한다.
- 장터, 백골(白谷) 시장(市場)
1934년 홍수로 구마전에 있던 장터가 물에 떠내려 가자 거기 살던 사람들이 옮겨 와서 마을이 형성된 행정중심지로 소화리(所華里)와 마전리(麻田里)로 나뉘어 있으나 한 마을이다. 안백골 남동(南東)쪽이다.
麻田里
- 본래 용궁현(龍宮縣) 예하면(內下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계리, 원학리와 병합하여 마전리(麻田里)라 했다.
- 석계동(石溪洞), 시끼동, 음지시끼동
임란후(壬亂後) 연안차씨(延安車氏)의 석은(石隱) 차후란(車後連)이 마을을 개척하여 그 후손이 살고 있으며, 북(北)향 마을로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돌과 쇠가 있어서 쇳물이 늘 흐르므로 물고기가 깃들지 못한다고 한다. 뒷산에 절골이 있는데 지금도 기와 조각이 보인다.
- 양지시끼동, 양지석계(陽地石溪)
석계동 맞은 편에 있으며 석계동보다 늦게 개척되었고, 양지 바른 남향받이 이므로 양지석계라고 부르는 각성촌이고 마을 앞으로 석계천(石溪川)이 흐른다.
- 삼밭나드리, 구마전(舊麻田)
낙동강(洛東江)변에 있는 교통의 요지로 구한 말까지는 강을 거슬러 올라 오는 소금배가 기착하든 나루터다. 오랜 옛날부터 장이 서고 상업의 중심지였으나, 1934년(甲戌年) 대홍수 때 떠내려 가고 장터는 지금의 위치인 백골로 옮겨가서 마전(麻田)이라 하니, 이 곳은 저절로 구마전(舊麻田)이 되고 높은 지대에만 마을이 남아서 농촌이 되었고 갯가에는 삼밭이 많았으며 또는 서울로 올라 가는 나루터였다고도 한다.
- 월태이, 월탄(月灘)
지금은 초등학교가 세워진 지역으로 지형이 조집모산형(朝集慕散形)이므로 개인이 살기 드세다고 한다. 옛날부터 큰 인재가 날 곳이라 하였는데 1760년대에 신동(神童)이 태어나서 월탄동자(月灘童子)라고 했으며 본명은 안필성(安必成)이다. 열 살에 학문이 대성해서 많은 일화와 작품을 남겼으나, 그가 11세에 요절하자 아버지가 슬퍼하여 그 많은 유고(遺稿)를 불 태우고 지금은 몇 편만 남아 있다.
- 워낙골, 원학(元鶴, 元學)
40여가구의 연주현씨(延州玄氏) 집성촌이다. 고려말 이조(李朝) 초(初)에 사월(沙月) 현옥량(玄玉亮)이 고려(高麗) 세신(世臣)으로 나라가 망한 것을 통탄하고, 이태조(李太祖)가 높은 벼슬로 부르는 대도 응하지 아니하고 지금의 호명면(虎鳴面) 사월(沙月)에 정착하였고, 그 후손이 이곳으로 이주하여서 우리 고장에서는 가장 오래된 촌락(村落)이기도 하다. 지세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며 학성정이 있었다 하여 유래(由來)된 마을이라고 한다.
- 백골, 요성(腰城), 마전장터(麻田市場)
1934년 갑술년(甲戌年) 큰장마로 낙동강(洛東江) 물이 범람하여 구마전(舊麻田)에 있던 장터가 이곳으로 옮겨 와서 마을이 번창해지자 마전(麻田)장터라 했으며, 맞은 편이 소화리(所華里) 백골이다.
- 삼거리
구마전(舊麻田)의 한 마을이며 대구(大邱) 안동(安東) 예천(醴泉)으로 통하는 세 갈래 길목이다. 낙동강(洛東江)에 소금배가 오르 내릴 때는 마전(麻田)도방이라고 하여 소백산(小白山) 이남의 화물 집산지였고, 지금은 낙동강(洛東江)에 지인교(知仁橋)가 가설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 등말랭이, 비선거리
구마전(舊麻田) 복판 등성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 등말랭이는 안동(安東)과 상주(尙州)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 이유인(李裕寅)을 비록하여 용궁현감(龍宮縣監), 유교목(柳敎睦) 정인량(鄭寅亮) 김상일(金相一)등의 선정비가 있으므로 비선거리라기도 한다. 또 이곳에는 본도(本道) 관찰사(觀察使) 정기선(鄭基善)의 선정비(善政碑)가 있었는데 그 비석은 쇠로 되었으며, 돌비는 음각(陰刻)이지만 이 비는 양각으로 주조된 특이한 비다. 1934년 대홍수로 비각이 무너지면서 두 동강 난 것을 도장리(道庄里) 정사(鄭賜)의 묘역 산기슭으로 옮겨 세웠다.
知保里
- 본시 용궁현(龍宮縣) 예하면(內下面) 지역이다. 사람이 살자면 예나 이제나 강(江)과 무관할 수는 결코 없다. 낮은 산에 넓은 강 그리고 넓은 들 이것이 사람 사는 이상향이다. 수륙교통의 요충지(要衝地)가 지보리(知保里)이다. 따라서 촌락(村落)이 형성된 지는 무척 오래이며 문헌을 더듬으면 고려(高麗)때까지 소급(溯及)할 수 있고, 한때 면행정(面行政)의 중심지(中心地)이기도 했다. 학가산맥(鶴駕山脈) 태을봉(太乙峰) 청룡등(靑龍嶝) 안에 있는 이 마을은 옛날 박씨(朴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개척 당시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수령이 4백년이 넘었으며, 지금은 고령이나 아직도 일부는 청청한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산 밑에 있는 동래정씨(東來鄭氏) 재사(齋舍)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지보암(知保庵)이고 지금도 들보에는 중들이 메투리 날을 훌던 자국이 남아 있고 여러 가지 전설이 있으나, 이 지보암(知保庵)으로 인하여 1914년 면(面)이 통합될 때 지보면(知保面) 지보리(知保里)가 명명(命名)된 듯 하다. 이 지역은 신라(新羅) 때 불교(佛敎)가 전성할 때의 대암사(大岩寺)라는 사지(寺趾)가 남아 있고, 불타산(佛陀山)의 암자(庵子) 지보암(知保庵) 부채 등 빙고등(氷庫嶝) 석탑(石塔)이 있고, 도처에 큼직한 고려장(高麗葬)들이 널려 있다. 지보면(知保面)이 발족되자 행정중심지(行政中心地)로서 면소재지(面所在地)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 사설학당(私設學堂)이 있었으며, 앞 강(江)변 마을에는 지보시장(知保市場)이 형성되어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뒤 낙동강(洛東江) 수해로 인하여 구마전(舊麻田)으로 시장(市場)이 이전(移轉)하였다.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했으므로 낙동강(洛東江)을 이용하여 안동(安東) 김해(金海) 간(間) 소금배로 미곡(米穀)을 무역해서 면민(面民)의 편리를 도모하였다. 낙동강(洛東江) 상류인 소백산(小白山) 춘양(春陽) 등지에서 송림(松林)을 채벌(採伐)하여 낙동강수(洛東江水)가 범람할 때 뗏목을 베어 하류로 띄워서 그 재목으로 가옥 건립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34년 갑술년(甲戌年) 대홍수(大洪水) 때는 안동(安東)의 유명한 영호루(映湖樓)와 많은 가옥이 붕괴(崩壞)되어 난민들이 지붕을 타고 급류에 휘말려 표류하다가 마을 앞 섬 송림에 걸려서 사람 살리라는 비명을 듣고 이 마을 청년들은 결사적으로 배를 저어 40여명의 인명을 구출하였으므로 활인도(活人島)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지역은 앞에는 비봉산(飛鳳山)이 높이 솟았고, 낙동강(洛東江)이 흐르는 산고수려(山高水麗)한 마을이다. 강변에 제방을 쌓아 홍수의 피해가 없으며, 전천후공사(全天候工事)로 양수장을 설치하여 한해(旱害)가 없으며, 넓은 평야 기름진 옥토(沃土)에 많은 생산을 가져와 어느 마을보다도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교통편으로는 의성(義城), 대구(大邱), 예천(醴泉)으로 수차례씩 버스가 내왕(來往)하고 있다. 지보리(知保里)는 3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큰마(大村)
이 마을은 350년전 능성구씨(綾城具氏)와 남원양씨(南原梁氏)가 자리잡아 현재 60여 가구(家口)가 있고, 수령이 높은 느티나무가 마을 앞에 서 있다. 1950년에는 장로교(長老敎) 고신측(高神側) 교회(敎會)가 서 있다.
- 새마을(新村)
100여 가구(家口)가 사는 함안조씨(咸安趙氏) 집성촌이다. 현종(顯宗) 때(1670년) 새로운 기지(基地)를 찾아다니던 조진도(趙振道)가 불타산(佛陀山) 부처 등이 둘러 싸였고, 그 앞으로 낙동강(洛東江)이 흘러서 마을 터의 지세를 살피니 하늘의 금성(金星)처럼 생겼음으로 자손 번성을 가히 기약할 만 하다고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 샛마(上洛)
대촌(大村)과 신촌(新村) 사이에 있고 1906년에 기독교(基督敎)가 개척한 후 마을 이름을 상락(上洛)이라고 했다. 350년 전 남원양씨(南原梁氏)가 택거했고, 그 후 안동김씨(安東金氏), 용궁전씨(龍宮全氏)등 여러 성(姓)이 20가구(家口)가 살고 있다. 교회를 통하여 사설학당이 있었고, 교육열이 강하여 많은 인재을 배출했다.
- 햇마(火仁洞)
동(東)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서 옛날에 홰나무가 있었다고 해서 햇마로 불렀다고 한다. 현재 청주정씨(淸州鄭氏) 재실 한집이 살고 있다. 화인(火仁)은 이두문이다.
道庄里
- 본래는 용궁면(龍宮縣)의 예하면(內下面)으로 면내에서는 가장 면적이 작은 곳이라고 한다. 도경리(道京里)와 익장리(益庄里)에서 한 자씩 떼서 도장리(道庄里)로 이름하였다. 이에 속한 촌락은 도경(道京), 익장(益庄), 구촌(九村), 새낙골, 배낙골, 도름터, 해평(海坪)등이고, 성씨(姓氏)는 동래정씨(東萊鄭氏), 영일정씨(迎日鄭氏), 의성김씨(義城金氏), 김녕김씨(金寧金氏) 등이 각각 특성있는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 일쟁이, 익장(益庄)
익장(益庄)의 지명(地名)은 석문(石文) 정영방(鄭榮邦)이 처음 기지를 잡은 것으로 안다. 석문집(石文集)에는 중년(中年)에 여기에다가 집을 짓고 살면서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먼저 십리나 떨어진 포내(浦內)의 백씨(伯氏) 매오공(梅塢公)에게 보내고 그 다음에 公이 맛 보았다고 한다. 뒤에는 태을산(太乙山)이라고도 하는 삼봉산이 있고, 거기에는 중턱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발가락 다섯 개의 큰 발자국이 있어 장수바위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 장수가 안산(案山)인 반달섬 앞 비봉산(飛鳳山)에까지 뛰어 올랐다고 한다. 여기에는 또 성황당이 있고 부채샘이 동리안에 있는데 아마도 부처님과 유관하나 보다. 내성군(萊城君) 정기원(鄭期遠)과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의 불천위(不遷位) 사당(祠堂)이 있고 지포강당(芝圃講堂)이 있다. 익장(益庄)의 이름은 말장이의 원색 짙은 설화도 있지만 대학장구(大學章句)에 인기기지지이이익궁지(因其己知之理而益窮之)에서 명명(命名)하였다 한다. 석문집(石門集)에 익장(益庄) 33영(詠)이 보인다. 내성군(萊城君) 사당(祠堂)에는 주문(族門)이 있다. 마을중앙의 대창맑에 자리한 속칭 정묘(鄭墓)는 직제학(直提學) 정사(鄭賜)의 묘소인데 손자대로부터 조선조(朝鮮朝)에 12사람의 정승(政丞)이 나서 전국에 있는 팔명산(八名山) 중의 으뜸이라고들 한다. 공(公)은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재임중 54세에 별세하였다. 이 묘소(墓所)에 얽힌 성화는 이러하다.
명산(名山)을 구하고자 상주(喪主) 정란손(鄭蘭孫) 등 5형제는 당시 음양학(陰陽學)에 밝기로 유명한 朴(박)(失名-실명)풍수를 앞세우고 배로 운구(運柩)를 하여 낙동강(洛東江)을 거슬러 오다가, 선영(先塋)이 있는 용궁(龍宮) 땅에 이르러 명산이 있음직하여 배를 멈추고 묘터를 찾으니 한 발 앞서 누군가가 광중(壙中)을 하고 있었다. 낭패스러운 박(朴)풍수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나 보자고 찾아 갔더니 그들은 마침 수만광중(水滿壙中)이라 묘쓰기를 단념하고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상주에게서 그 묘터를 얻은 박(朴)풍수는 동서(東西)로 5리씩이나 떨어진 3곳에 우물을 파고 물고인 광중(壙中)에다가 왕겨를 넣으니 그 물과 겨는 3곳의 우물로 빠져 나가고 광중(壙中)은 굳어져 조강하여짐으로 여기에다가 묘(墓)를 썼다고 한다. 제사(齊舍)인 지보제(知保齊)는 옛 사찰(寺刹)인 지보암(知保庵)이고 부근에 흩어져 있는 석탑재(石塔材)로 한 개의 탑(塔)을 조립하여 공(公)의 종택(宗宅) 앞 논 가운데 세웠다. 이 묘의 후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정기선(鄭基善)의 철비(鐵碑)는 1934년 구마전(舊麻田) 비선거리에서 옮겨 세웠다. - 디깅이, 도경(道京)
안산(安山) 묏굼 등은 옛날에 안씨(安氏)들이 살았던 자취이다. 그리고 불교(佛敎)적인 지명인 탑(塔)골이 마을 뒤에 있고 옹기를 굽던 도요지도 있으며, 천주교도(天主敎徒)들이 박해를 피하여 이 마을로 숨어 들어와 살면서 옹기짐을 지고 다니며 전도를 해서 예천군(醴泉郡) 내(內)에서는 가장먼저 천주교(天主敎)가 발붙인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옛 선비들이 서울로 과거(科擧) 보러가는 길목이라고 도경(道京)이라 이름지었다는 설도 있다. 이 마을은 의성김씨(義城金氏)에 도송당(道松堂)이라는 호(號)를 쓰던 김성응(金聲應)이 개척하여 그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요즈음은 동래정씨(東萊鄭氏)도 산다.
- 구촌(九村)
익장(益庄)에 살던 동래정씨(東來鄭氏)의 한 갈래가 옮겨 와서 이룬 타성(他姓)이 못 산다는 동성촌락(同姓村落)이다. 마을 뒷산에 있는 아홉 그루의 느티나무에 붙여 구괴암(九槐菴)이라고 자호(自號)한 선비 정귀복의 후손들이 눌러 살면서 구촌(九村)이라고 했으며, 마을의 지세가 거북이 흙탕에서 헤어 나오는 형국이라고 구촌(龜村)이라고 쓰기도 한다. 천년노송인 그 느티나무가 봄에 잎이 잘 피면 그 해 풍년이 들고, 또 여름에 가물다가도 이 나무가 울면 그 소리는 10리에 뻗히고 비가 내리며, 그 울음소리는 나무안에 있는 용(龍)이 우는 소리라고 믿고 있다. 동신목(洞神木)이기도 한 이 나무에 치성(致誠)하면 영험이 있다고 원근(遠近)에서 기자(祈子), 기복(祈福)m 소재(消災)를 위해 모여 들었었다. 원래 마을 터는 안씨(安氏)들이 잡았고 앞으로는 박씨(朴氏)들이 들어와 살 것이라는(안정박계거지지-安鄭朴繼居之地) 예언 때문에 박씨(朴氏)등을 경계하는 마을이다.
- 새낙골(鳥飛洞, 鶴村)
이 마을도 익장과 구촌처럼 동래정씨(東萊鄭氏)만 사는 동성촌락(同姓村落)이다. 지형(地形)이 새가 높이 나는 형국(조비상천형-鳥飛上天形)이므로 생겨진 마을 이름이고, 효자죽계(孝子竹溪) 정대서(鄭大瑞)의 후손(後孫)인 용구(鎔九)가 개척해서 당내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는 양지 바른 남(南)향 마을이다. 학은(鶴隱) 정운극(鄭雲極)이 서당을 열고 훈학하면서 마을 이름을 학촌(鶴村)이라고 썼다.
- 배낙골(梨湖)
새낙골 서(西)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두 마을이 이어졌지만, 배낙골이 먼저 개척된 곳이다. 그 옛날 이 마을을 개척한 이는 김녕김씨(金寧金氏)로서 이 고장의 동래정씨(東萊鄭氏)와 결사(結査)한 인연으로 여기에 터를 잡은 김동(金棟)이다. 본시 마을 이름이 없던 곳인데 그 아들 대(代)에 어떤 풍수가 찾아와 하룻밤을 묵고 가면서 이 골에 배나무를 심으면 지세가 배나무에 꽃이 피는(이목개화형-梨木開花形 일설一說)에는 梨花落地形) 형국이 될 것이니, 배나무를 심고 마을 이름도 거기에 맞추어 배나무골이라고 부르면 좋겠다 하고 떠났다. 그 말에 따라 심었다는 청실배나무는 이 고장의 흉풍을 점치는 나무가 되어 지금도 싱싱하다.
- 도름터, 해평동(道陰, 海坪洞)
일반적으로 안마을을 도름터, 바깥 마을을 해평동이라고 하나 한자표기로는 주로 해평동(海坪洞)이라고 쓴다. 옛 용궁현(龍宮縣)이지만 지금은 의성군(義城郡) 신평면(新平面)이 된 신상면(申上面)에 살던 영(迎)일정씨(日鄭氏)로 해암(海菴) 정덕채(鄭德采)라는 이가 안마을을 개척해서 지금까지 그 후손이 살고 있다. 마을 앞길이 응달져서 늦봄까지 얼음이 쌓이므로 도음(道陰)이라는 뜻으로 도리터 도리티하다가 변음(變音)이 되어 도름터가 되었다고도 하며, 바깥 마을이 생기면서 해평동(海坪洞)이라고 썼다.
이 마을 앞의 산과 들의 이름이 두지머리 조개등(貝嶝) 황새등(鶴嶝) 들개 등 바닷재(海峴)등 바다와 연관성 있는 지명을 아름답게 여겨 붙여진 이름이다.
바깥 마을앞에 어룸샘이라는 식수샘이 있는데 익장(益庄)에 정묘(鄭墓)를 쓸 때 팠다고 하며, 우물바닥에 그 쪽으로 뚫린 큰 굴이 있다. 과거 보러 갈 때 이 샘물을 마시고 가면 급제(及第)한다고 길손들이 모여 들었는데 명산 정기를 나누어 가지기 때문이다.
道化里
- 본래 용궁군(龍宮郡) 신상면(申上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축동 화량동 삼송동 도마동 일부를 병합하여 도마와 화량의 이름을 따라 도화(道化)라 했다.
- 싸릿골, 축동(杻洞)
사창 못뚝 밑에 있는 70여호의 각성촌이다. 300여년 전 삼척김씨(三陟金氏), 경주최씨(慶州崔氏), 청도김씨(淸道金氏)가 같은 해에 들어와 무성한 싸리나무를 베어 내고 개척했는데 지금도 삼척김씨(三陟金氏) 종가에는 싸리기둥이 남아 있다.
- 창마, 사창(社倉)
낙동강(洛東江)변에 위치하고 조선조에 이 마을의 도화리(道化里) 190번지에는 용궁현(龍宮縣)의 환곡을 쌓아 두던 사창이 있었다. 마을 앞에 용궁현감(龍宮縣監) 한종규(韓宗揆)(숙종때, 1713년)의 영세부방비(永世不忘碑)가 있다. 이 비석을 광복 후 마을 앞 개울의 돌다리로 사용했다가 마을에 재화가 끊이지 아니하므로 다시 제자리에 세우고 환경도 미화했다.
- 삼송(三松)
화량 서쪽에 있는 마을이고 병자호란 후에 양동지(梁同知)가 개척했으며, 마을 앞에 세그루의 노송이 있어 당시에 길손들이 쉬어 가던 곳이므로 삼송(三松)이며, 마을 뒷골 웃마시들은 수세가 좋아 살기 좋은 곳이다. 특히 이 마을의 개척자인 양동지(梁同知)가 후손이 없으므로 동민들이 계를 모아 묘소를 수호하면서 매년 제사를 지내 주고 있다.
- 도마티, 도마(道馬)
지형이 칼도말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지어 졌다고 한다. 마을 앞 연화봉(蓮花峰) 딴등에서 군사들이 숙영하든 터가 남아 있다고 하니 아마도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 하랑골, 화랑골(化浪)
싸리골 서쪽에 있는 안동김씨(安東金氏) 집성촌이며 지금부터 약 200여년 전에 이들 조상이 새로운 기지를 찾아 여기까지 오니 해가 저서 쉬어 가게 되었는데, 연못에 부용이 곱게 핀 꿈을 꾸고 여기에 터를 잡았다고 하며, 마을 앞 들판은 곡식이 잘된다고 화량(禾良)이라기도 한다는 마을이다.
- 불미골, 불미고개, 야현(冶峴)
지형이 불무처럼 생겼다 하여 불미골이란다. 삼송(三松)에서 시고개(三峴)로 넘어 가는 길목에 있으며 길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은 후미진 곳에 있다.
新豊里
- 본래 용궁군(龍宮郡) 신상면(申上面)의 지역으로서 신리(新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리 직동 방학동 구룡동 대죽리 일부를 병합하여 新豊이라 했다.
- 신풍(新豊)
150 여가구의 파평윤씨(坡平尹氏) 집성촌이다. 마을이 너무 커서 위치에 따라 윗마을 아랫마을이라고 하며, 또 길 건너 있는 마을을 청미라고 부른다. 고려초에 태사 권행(權幸)이 이 근처에 분음막을 설치하고 한 대(大竹)라고 했으며, 그 뒤 조선(朝鮮) 초에 사직(司直) 이장준(李長俊)이 보은(報恩)에서 취향(娶鄕)이 곳에 이거(移居)하였는데 그 처가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그 뒤에 이씨(李氏)는 용궁면(龍宮面) 가오실(佳梧室)로 이거(移居)하였지만, 뒤따라서 용궁(龍宮) 무촌(武村)에서 참의(參議) 윤탁(尹琢)이 이 곳에 이거(移居)하였다. 당시에는 이씨(李氏)와 이웃해서 산 듯하다. 윤탁(尹琢)은 만돈암(晩遯庵) 만돈암(尹師晳)의 후손이다. 그 뒤에 지금의 대죽리(大竹里)와 분리하여 신풍(新豊)이라 불렀는데 대죽리(大竹里)는 5리가 채 못되게 떨어져 있다.
- 구룡동(九龍洞)
40여가구의 안동김씨(安東金氏) 집성촌이다. 김수준이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아버지를 여의고 모친 안동권씨(安東權氏)등에 업혀서 외가인 이곳 송라동(松蘿洞)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용모가 비범하고 골격이 준수하여 7일만에 말을 하고 다락에 올라가므로 주위에서는 이 마을에 장수가 났다고 법석이었으나, 힘센 장수가 나면 역적으로 모함을 받아 멸문의 화를 입는다고 두려워하여 이 집에서는 챗돌로 눌러서 17일만에 죽게 했다고 한다.
이 때 마을 앞 중래산(重萊山)에서 용마(龍馬)가 9일이나 슬피 울다가 사라졌고, 마을의 식수가 핏빛이 되었다. 때마침 시주 나온 중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가르침을 구했더니 이 우물은 장군수이므로 장수가 먹어야 하는데, 장수가 못 먹게 되니 우물도 그 일을 슬퍼하여 빛깔이 변했으니 식수로 쓸 수 없다고 하므로, 그 중에게 새로 살 터를 구해 달라고 해서 지금의 마을터를 잡아 주고 죽은 어린 장수와 용마(龍馬)의 넋을 달래기 위해 구룡동(九龍洞)이라고 마을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고 구전(口傳)된다.
풍수설로는 아홉 마리의 용(龍)이 여의주를 다투는 구룡쟁주(九龍爭珠) 명당이 있어서 구룡동(九龍洞)이라고 한다기도 한다.
- 피앗골,직동(稷洞)
고려(高麗) 말(末)에 절신(節臣) 권(權)?가 이곳에 숨어서 절의를 지키며 뒷산인 염송산(念松山)에 올라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옛 왕실의 안부를 걱정했다 하여 염(濂)자를 염(念)자로 고쳐 염송산(念松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 이름을 피난골이라고 하던 것이 피앗골로 변했다고도 하며, 또 피가 많이 생겨서 잘 자란다고 해서 직동(稷洞)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 방앗골, 방학동(放鶴)
신풍 남서(南西)쪽에 있는데 지형이 디딜방아처럼 생겨서 방앗골이며, 또 뒷산에 학(鶴)이 서식하여 방학동(放鶴洞)이라고도 한다는 남(南)향받이 마을이다. 임난후(壬亂後)에 윤완(尹琓)이 개척하여 그 후손이 이어 살고 있는 파평윤씨(坡平尹氏) 집성촌이다.
- 샛방앗골
구룡동과 방앗골 사이에 있으므로 샛방앗골이며 방앗골에서 옮겨 온 파평윤씨(坡平尹氏)들이 살고 있는 30여 가구의 동성촌(同姓村)이다. 앞들이 넓고 기름져서 살기 좋은 남(南)향 마을이다.
- 절골, 사곡(寺谷), 절동(節洞)
고려(高麗) 말(末) 이조(李朝) 초(初)에 이곳에 숨어 세상을 등지고 살던 권(權)?는 이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고 해서 절동(節洞)이라고 하고 후세에 절동(節洞)이 사곡(寺谷)으로 변해졌으며, 후인들이 사곡(寺谷)이라고 각자(刻字)한 주춧돌은 지금도 남아 있으며, 죽림(竹林)(권산해-權山海의) 순절하였음을 알리는 선충각(旋忠閣)이 여기에 있다.
- 황소말, 황소말기
방앗골 북쪽에 있는 고개가 황소등과 같이 생겼다고 하기도 하고, 또 황새등처럼 생겼다고도 하는 황소등말냉이 아래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방앗골과 이어져 있으므로 한 마을처럼 보이지만 마을 이름은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
- 서당마, 서당동(書堂洞)
신풍(新豊)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신풍(新豊)에 살고 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를 중심으로 12문중(門中)이 조선(朝鮮) 중엽(中葉)에 힘을 모아 후진을 양성하며, 학문을 강론할 목적으로 서당을 세웠던 곳에 생긴 마을인데 서당터는 남았으나 12문중(門中)이란 성씨(姓氏)는 알 길이 없다.
- 써놋골, 써닛골
구룡동(九龍洞) 뒤쪽의 골짜기인 써닛골에 생긴 마을이며 지형이 무논에 쓰는 농기구인 써레처럼 생겼으므로 그 지형에 따라 지은 이름으로 앞들은 토질이 비옥하고 농사가 잘 되기로 손꼽힌다.
大竹里
- 본디 용궁현(龍宮縣) 신상면(申上面)의 지역이다. 대나무가 무성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암천리(岩川里) 일부를 병합하여 대죽리(大竹里)라고 했다.
- 한대(大竹里)
옛부터 우리나라의 십명지(十名地)로 전해 오는 마을이다. 봉두령(鳳逗嶺)을 주봉으로 남쪽에 원방산(圓方山)이 있고, 동쪽은 주동포산(舟登浦山)이 좌청룡(左靑龍)을, 서쪽은 앞 남산이 우백호(右白虎)를 이루고, 남쪽으로 낙동강(洛東江)이 흐르는 삼태기 형으로 된 정남향(正南向)의 마을이다. 대나무가 무성하던 곳에 마을이 생겼다 하여 대죽리(大竹里)라고 하며 예부터 <한대>라고 부른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5년에 권태사(權太師)<幸>가 이곳을 지나다가 농부를 위하여 움막을 지어 주고 (분음막)分陰幕이라고 하였으니 신라(新羅) 때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대죽리(大竹里) 북쪽 봉두령(鳳逗嶺)(봉우재 또는 봉화재) 밑에 법정(法井)골이 있는데 신라시대(新羅時代)에 법정사(法井寺)가 있었다고 하나 절터만 남아 있다(탑기塔基가 있다). 봉황鳳凰은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고 짝을 맛춘 이름이고 마을은 웃한대(上大竹) 아랫한대(下大竹)로 나누어 있었는데, 아랫한대는 파평윤씨(坡平尹氏)가 살고부터 신풍(新豊)으로 개명하여 신풍리(新豊里)가 되었고, 웃한대는 마을이 커지면서 다시 동(東)쪽 마을과 서(西)쪽 마을로 나누어졌고, 옛날에 마을 사람들끼리 말싸움을 자주 하므로 이 마을 사람들이 주등포산(舟登浦山)을 개의 주둥이 같이 생겼다고 하며, 주둥이를 막으면 말싸움이 없어질 것으로 하여 주둥개산(山) 중(中)허리에 말무덤(言塚)을 만든 후부터는 말싸움이 없어지고 마을이 평화로와 졌다는 전설이 있다.
주등포산(舟登浦山)은 양설이 있는 바 그 옛날 수천년 전 낙동강(洛東江)물이 주등포산(舟登浦山) 옆으로 흘렸으므로 그 곳이 배를 메어 두던 나루터였다고 하여 주등포산(舟登浦山)이라는 말도 있고, 또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로 산(山)의 형국이 배와 같다 하여 주(舟)자를 따서 주등개 산이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다. 대죽리(大竹里)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전후하여 밀양박씨(密陽朴氏)와 인천채씨(仁川蔡氏)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으나(그 당시 여기 살던 춘천박씨(春川朴氏)는 퇴계(退溪)(이황李滉)의 외가(外家)이기도 하다), 임란후(壬亂後)에 김녕김씨(金寧金氏) 김덕공(金德恭)이 입향(入鄕)한 후 지금 대죽리(大竹里) 서쪽 마을은 김녕김씨(金寧金氏) 4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고, 밀양박씨(密陽朴氏), 인천채씨(仁川蔡氏), 진주류씨(晋州柳氏) 등 여러 성씨(姓氏)가 살고 있다.
그리고 인맥으로 보면 조선초(朝鮮初) 권죽림(權竹林)(호 산해山海)이 이 마을에서 태어나 사육신(死六臣)과 동순(同殉)했고 성오당(省吾堂)(경주인慶州人 이개립李介立)이 태어난 곳이다.
岩川里
- 본래 용궁군(龍宮郡) 신상면(申上面)의 지역으로서 안에 너리바위가 있으므로 너리바우 또는 광암(廣岩) 암천(岩川)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동군 풍서면의 구담리 일부를 병합하여 암천리(岩川里)라 했다.
- 너리바우, 광암(廣岩), 암천(岩川)
예천임씨(醴泉林氏)가 많이 사는 마을이며 마을 앞 개울 바닥이 아주 넓은 바위로 뒤덮여 있는 곳에 생긴 마을이므로 너리바우라고 한다.
- 갈피동, 갈포(葛浦)
예천임씨(醴泉林氏) 세거지이며 옛날 용궁(龍宮) 예천(醴泉) 안동군계(安東郡界)의 마을이다. 너리바우 북서쪽에 있고, 1872년 갈대밭을 개척하여 마을을 개척했다 하여 갈피동 또는 갈포라 부른다고 한다.
- 강정(江亭)
낙동강(洛東江)변에 자리 잡은 너리바우 남동쪽 마을이며 강정(江亭)이란 정자(亭子)의 이름을 딴 것이며 안동군(安東郡) 풍천면(豊川面) 구담동(九潭洞)과 이어져 있다.
- 장구매기, 부항(缶項)
너리바우 남동쪽에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부항(缶項)이라고 군지 등에 표기되어 온 고장이龍宮郡다. 뒷산이 국악기(國樂器)인 장고의 허리처럼 생겼으므로 장구목재라고 부르며 그 앞의 남(南)향받이 마을이다.
- 재궁마, 재궁촌(梓宮村, 齋宮村)
장구매기와 너리바우 중간 지점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권씨(權氏)들 재사가 있어서 재궁마라고 한다고 하나 옛 군지에 재궁촌(梓宮村)이라고 있으니 재궁(梓宮)은 제왕의 관(棺)을 뜻하는데 그 까닭은 아무도 모른다.
- 돌구마, 들구마
재궁마 동(東)쪽 우루골 北쪽에 위치한 곳이며 마을 복판에 돌절구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마을 이름이며, 기계문명이 발달하기 전에 그 마을이 돌절구나 연자방아를 가지고 도정을 했다는 것은 큰 자랑거리였다.
漁薪里
- 본래 용궁군(龍宮郡) 내상면(內上面)의 지역인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율리(栗里), 신전리, 갈동리, 어소리, 신류리를 병합하여 어소와 신전의 이름을 따라 어신리(漁薪里)라 했다.
- 어지리, 어소(漁沼)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용국(金龍國)이 개척하고 마을 앞 연못에서 고기를 낚으며 즐겼다는 곳이라고 마을 이름을 어지리 또는 어소(漁沼)라고 부른다. 지금은 그 연못이 개울바닥이 되었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구전되는 민담이 있다. 아주 인심이 좋고 후덕한 평산신씨(平山申氏) 부자가 대대로 이 마을에 살았는데, 원근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친속하게 이 집을 드나들며 마치 다정한 이웃처럼 지냈다. 가난한 사정을 듣기만 하고도 아무 말없이 도와주었으므로 근방에서는 이 부자를 말없이 도와 주는 벙어리라는 뜻으로 신(申버벌네)라고 했다. 이근처 사람들은 감기가 걸려 재채기를 할 때도 “신(申)버벌네집으로 가거라” 라고 했다. 역신도 가난한 사람을 괴롭하지 신전(薪田)말고 인심이 후덕한 申버벌벌네 집으로 가서 대접받고 가라는 뜻의 주문이라고 한다.
- 갈동(葛洞)
어지리 북서(北西)쪽에 있는 약40여 가구(家口)의 안동김씨(安東金氏) 집성촌이며, 임란(壬亂)전에 김희복(金希福)이 이 마을을 개척할 때 산에는 칡덩굴이 많아 들어갈 수 없고, 들에는 갈숲이 우거져서 새로 터를 잡기가 어려웠으므로 그 어려움을 후손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 갈동(葛洞)이라 했다 하며 지금도 칡과 갈대가 많은 마을이다.
- 다바우, 다암 (多岩)
어지리 북서(北西)쪽에 있으며 마을 뒷산에는 큰 바위가 즐비하게 있고 개울에도 돌이 많이 있다. 돌 많고 바위가 많아서 다바우라는 마을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섯밭, 섶밭, 신전(薪田)
다바우 남서(南西)쪽에 있는 마을로 다바우에 살던 심씨(沈氏)가 이곳으로 이주하고, 이 마을이 다바우에서 서(西)쪽이므로 서밭, 섯밭(西田)이라고 불렸다 하며, 또는 땔나무를 채취할 수 있던 지역이라는 뜻으로 신전(薪田)이라 했다고도 한다.
- 까막수리, 까막술, 오산(烏山)
이 마을 뒷산이 까마귀가 혈이고 앞산은 나지막한 언덕으로 송장혈이다. 뒷산의 소나무 위에 앉은 까마귀가 앞산의 죽은 산을 보고 시끄럽게 우는 곳이라 하여 까막수리 또는 까막술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옛날 어느 해 큰홍수에 사람이나 가축이 모두 휩쓸려 죽고 다만 까마귀떼 만이 마을터를 뒤덥고 슬피 울어서 까마귀가 슬피 운 곳이라는 뜻 이라기도 한다. 또 남(南)쪽 선비들이 낙동강(洛東江)을 건너 서울나들이를 거쳐 과거 보러 가는 길목의 주막거리였는데, 이곳 주막에서 선비들이 쉬고 갈 때 주모들이 이들을 새선비라고 불렀다. 그래서 선비가 머물러 가는 곳이라고 풍류객 어느 선비가 신류(新留)라고 했다가도 한다. 또 공술 먹고 환대 받고 갈 수 있는 곳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는 까닭 없이 술값을 물게 되거나 금전상 손해를 보게 될 때 그 사람을 오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松坪里
- 본래 용궁군(龍宮郡) 내상면(內上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송리 외평리 고슬리를 병합하여 송평리(松坪里)라 했다.
- 가마골, 오송(烏松)
옛날에 숯가마가 있던 곳이라기도 하며 지형이 가마솥처럼 생긴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가마골이라 불린다. 박모(朴某)가 개척한 터라 하나 지금은 용궁전씨(龍宮全氏)들이 살고 있다. 처음에 박씨(朴氏)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앞들에 우물을 팠더니 밤마다 그 우물에서 용(龍)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므로 그 우물을 메우고 또 딴 곳에 우물을 파도 역시 용(龍)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니, 박씨(朴氏)들이 살터가 아니므로 용(龍)이 노했다고 여긴 박씨(朴氏)들이 떠나버리고, 그 뒤 청주정씨(淸州鄭氏)들이 옮겨 와서 가마골이라고 마을이름을 삼았으며, 그 뒤로는 용(龍)이 마을을 잘 지켜주어 부촌이 되었다고 구전(口傳)한다.
- 새동네, 신동(新洞)
가마골 남동(南東)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가마골에서 약 1km 떨어진 도로변에 위치한 마을로서 들따라 농사짓기 편리한 곳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동(新洞)이라 부른다.
- 바깥들, 외평(外枰)
조선(朝鮮) 초(初) 순흥안씨(順興安氏)들이 터전을 잡을 때 앞들이 모두 밭이고 논이 없으므로 밭들(田坪)이라고 불렀던 마을이라고 하나, 임란(壬亂)후 빈터로 남았다가 산골의 마산(馬山)에서 1870년경 안동장씨(安東張氏)들이 들어오면서 들이 넓고 교통이 편리한 산 밖으로 나왔다고 하여 바깥들 또는 외평(外枰)이라 불렀다는 것이며 50여호의 안동장씨(安東張氏) 집성촌이다.
- 거리실, 거리마
외평(外枰)에 살던 장씨(張氏)들이 외평(外枰) 바깥쪽을 다시 개척한 마을이므로 거리실이며, 동(東)으로 매봉산이 높이 솟았고 들이 넓어 농사짓기나 교통상 매우 편리한 마을이다.
- 고실고개, 고슬(鼓瑟)
외평(外枰) 동(東)쪽의 고슬(鼓瑟)고개는 호명면(虎鳴面)과의 면계(面界)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東)쪽으로 매봉이 있고, 남(南)쪽으로는 비봉산(飛鳳山)이 수려하고 서(西)쪽으로는 고려말(高麗末)에 홍건적을 정벌한 김득배(金得培) 장군의 군졸들이 주둔했다는 진영산(陳嶺山)이 높이 솟았고, 北으로는 내성천(乃城川)이 유유히 흘러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며, 지형 또한 탄금형(彈琴形)이므로 이 마을 사람들은 풍류를 즐겼다고 하며, 황씨(黃氏) 고씨(高氏) 이씨(李氏)등 삼성(三姓)이 주로 살고 있다. 예천읍지(醴泉邑誌)에서는 고실고개를 고곡현(古谷峴)이라고 적었다.
首月里
- 본래 용궁군(龍宮郡) 내상면(內上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수동리 서월리 내동 성촌을 병합하여 수동과 서월의 이름을 따서 수월리(首月里)라 했다.
- 수동(首洞)
50여 가구(家口)의 안동권씨(安東權氏) 집성촌이다. 고려(高麗) 말(末)의 안동권씨(安東權氏)의 한 유생(儒生)이 정착하여 개척하였다 하며, 조선조(朝鮮朝) 인조(仁祖) 때에 권태일(權台一)이라는 이가 자기 이름을 따서 태일동(台一洞)이라 불렀는데, 구한(舊韓) 말(末)에 용궁군수(龍宮郡守)가 이 지방을 초도(初度) 순치차(巡視次) 와 보니 산세가 좋고 마을이 아담하여 가히 머리잡아 찾을 만한 마을이라 하여 머리골(首洞)이라 한 데서 마을 이름이 개칭되었다고 한다.
- 안골, 내동(內洞)
남(南)으로 외연(巍然)한 진영산(陳嶺山)이 솟아 있고 북(北)으로는 도도히 흐르는 내성천(乃城川)이 가로하고 있다. 이 산고수명(山高水明)한 사이에 깊숙이 위치한 아담한 마을이 內洞(안골)이다. 깊숙이 들어간 동리라 하여 내동(內洞)이며, 전(傳)하는 말에 의하면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입향조(入鄕祖)인 죽담(竹潭) 최의(崔儀)가 처음에 살았던 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 벽제면(壁蹄面) 성석리(城石里) 내동(內洞)이 그리워서 망향(望鄕)의 뜻으로 내동(內洞)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1450년경에 안동권씨(安東權氏) 입향조(入鄕祖)인 권한생(權漢生)은 약관(弱冠)으로 함창현령(咸昌縣令)을 역임한 바 있는데 그렇고 보면 권씨(權氏)가 먼저 개척한 듯하다. 그 때 심은 들매나무를 남정(枏亭)이라 부르고 동씨(洞神)으로 삼고 지금까지 정월(正月) 15일이면 동신제를 지낸다.
지보면(知保面)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된 이 나무는 수령이 약 400년이다. 이 노목은 매우 영험(靈驗)이 있어서 동민(洞民)의 무사함을 기원함은 물론이고 제단(祭壇)에 밝히던 참기름 불종지를 가져다가 삼신을 빌면 어김없이 아들을 낳게 된다고도 했다.
그래서 남몰래 불종지를 가지려 가다가 실화(失火)를 해서 1890년대에 이 나무가 불탔으나 천행(天幸)으로 그 익년(翌年)에 새싹이 동아서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이 근처 경지(耕地)를 갈다 보면 간혹 아주 오래된 기와 파편(破片)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예전에 이 곳에 사찰(寺刹)이 있었을 법도 하다.
동구에 옛날에는 유명한 약수(藥水)샘이 어쩌나 사람이 몰려드는지 가난한 동민(洞民)들은 숙식 제공에 어려움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이을 막기 위해서 개를 잡아서 피를 뿌렸더니 그 후부터 약수(藥水)는 말라 버렸다고 한다. 마을 앞 들 이름이 개긍지들인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나 후세의 사람들은 농사짓는데도 우리 모두 긍지를 갖자 라고 풀이하고 있다.
- 잿마, 서월, 성촌
지금 20여가구(家口)가 살고 있으며, 마을 남(南)쪽 산인 진령산 줄기 중 가장 긴 산등성이에 동(東)향으로 된 마을이며, 마을 뒷산이 진등산인데 강 건너서 보면 구렁이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이 마을에 살다가 구렁이알이 깨어나면 마을 사람들은 어디론가 멀리 떠나야 좋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옛날에 인동장씨(仁同張氏)들이 마을을 처음 개척하여 집단으로 살면서 부득명(富得名)을 하였더니 마을 옆 산에서 구렁이가 알에서 깨어나자 장씨(張氏)는 차츰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조선조(朝鮮朝) 중기(中期)에 해주최씨(海州崔氏)가 한여(閒余)골에서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 뒷산에는 동학란(東學亂) 때 관군과 대치하여 싸우던 옛터로 잿마라고 불리워진다고 한다.
- 평짓마, 평지(平地)
현재 20여가구(家口)가 살고 있는데 300여년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 운세가 평지와 같이 순탄하라고 기원하는 뜻에서 평지마라고 한다. 마을 앞에 거목(巨木)이 있어 여름이면 휴식처로 풍치가 아름다웠으나 지금은 나무뿌리만 남아 있다.
- 오리골
현재 20가구(家口) 가량이 살고 있다. 잿마에 정착한 해주최씨(海州崔氏)는 약 250년 전에 이곳을 개척하여 살림을 났다고 한다. 금가마귀가 잡신을 물리치고 동민을 평화롭게 보호한다고 오자(烏字)를 넣어서 지은 동명이라고 한다.
- 진등
오리골 북(北)쪽 긴 등성 끝에 있는 독가촌이다. 20년 전만 해도 3집이 있었고 현재는 한 집 밖에 없지만 마을 이름은 여전히 존재한다.
- 성줏골, 성짓골, 성조동(盛鳥洞)
90여 가구(家口)의 경주최씨(慶州崔氏) 마을이다. 이 마을은 최씨(崔氏) 아닌 성은 못산다는 마을이라 하여 원래 홍씨(洪氏)와 문씨(文氏)가 개척했으나 최씨(崔氏)가 들어오자 멀리 떠나 버렸다고 한다. 그 까닭은 마을 뒷산을 새장말개라고 하는데 해질녘이면 잘 새들이 수없이 모여들어 새의 낙원을 이루니 산(山) 아래 새(佳)가 곧 최씨(崔氏)이며 최씨(崔氏)가 살 낙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 새터, 용장골, 신기(新基), 용장(龍庄), 용정(龍井)
성주골에서 경주최씨(慶州崔氏)가 건너 와 살므로 새터라고 하나, 마을 뒤에 큰샘이 있는데 용(龍)이 지나가다가 샘에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어 용장(龍庄) 또는 용정(龍井)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풍수설에 마을이 배 형국(形局)이라 배바닥에 구멍을 뚫으면 길조(吉兆)가 아니라고 샘을 메우고 마을 이름을 용정(龍井)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마을 앞산이 용(龍)처럼 생겼다고 용장(龍庄)이라고도 부른다는 마을이다.
상월리(上月里)
- 본래 용궁군(龍宮郡) 내상면(內上面)의 지역으로서 다릿골 위쪽이 되므로 웃다릿골, 상월곡, 상월곡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성조동과 용장을 병합하여 상월리(上月里)라 하였다.
- 성줏골, 성짓골, 성조동(盛鳥洞)
90여 가구(家口)의 경주최씨(慶州崔氏) 마을이다. 이 마을은 최씨(崔氏) 아닌 성은 못산다는 마을이라하여 원래 홍씨(洪氏)와 문씨(文氏)가 개척했으나 최씨(崔氏)가 들어 오자 멀리 떠나 버렸다고 한다. 그 까닭은 마을 뒷산을 새장말개라고 하는데 해질녘이면 잘 새들이 수없이 모여들어 새의 낙원을 이루니 山 아래 새(佳)가 곧 최씨(崔氏)이며 최씨(崔氏)가 살 낙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 새터, 용장골, 신기(新基), 용장(龍庄), 용정(龍井)
성주골에서 경주최씨(慶州崔氏)가 건너 와 살므로 새터라고 하나, 마을 뒤에 큰샘이 있는데 용(龍)이 지나가다가 샘에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어 용장(龍庄) 또는 용정(龍井)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풍수설에 마을이 배형국(形局)이라 배바닥에 구멍을 뚫으면 길조(吉兆)가 아니라고 샘을 메우고 마을 이름을 용정(龍井)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마을 앞산이 용(龍)처럼 생겼다고 용장(龍庄)이라고도 부른다는 마을이다.
晩華里
- 용궁현(龍宮縣) 내상면(內上面)의 지역인데 만촌, 구태, 방화를 병합하고 만촌(晩村)과 방화(芳華)의 자(字)를 모아서 만화리(晩華里)라 하였다.
- 한골, 방화(芳華), 대동(大洞)
위봉산(委鳳山) 기슭에 동향(東向)으로 자리잡은 아담한 마을이 있으니 이것이 한골이다. 연령 500년을 자랑하는 이 마을은 방화(芳華) 대동(大洞) 한골로 불리웠다. 대동(大洞)은 한골로 통하지만 방화(芳華)는 공산세사(公山世史)에 기인된 것이다.
동리 한 복판에 등성이가 하나 있어 취락이 양분되었으며, 두 동리의 통로를 「구렁목」이라 하였으니 이 말은 용수구(用水口)란 뜻이다. 수백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이 말의 뜻을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와서 낙동강(洛東江) 물이 이 구렁목을 잘라서 지나갔으니 이제야 그 뜻을 알게 되었지만, 방산공(方山公)의 역학(易學)이 아무리 밝다지만 500년 후인 오늘에야 정확하게 적중이 됐다 함은 다만 신기하기만 하다.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방산제(方山齊)의 아버지 임피현령(臨陂縣令) 진(畛)이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고 군현(群賢)이 취륙(就戮)탁함을 보았는데, 몸서리나는 정변(政變)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하여 영천(榮川)에 정착하였고, 그 아들 방산제(方山齊) 말손(末孫)이 이 곳에 기지를 잡고 은둔(隱遁)하던 곳이며, 아들 만강(晩岡) 의(誼)가 그 아버지가 세운 방산제(方山齊)를 고쳐서 경지정(敬止亭)이라 하였고 후세에 이를 중수(重修)하여 만강정(晩岡亭)이라 하였으니, 공숙공(恭肅公) 사봉(沙峰) 명덕(明德)의 후손들이 집단하여 사는 공주이씨(公州李氏) 세거지(世居地)이다.
- 새동네, 신촌(新村)
한골 살던 공주이씨(公州李氏)가 살림을 나서 서낭댕이 동(東)쪽에 새로 터 잡은 마을이므로 새동네라고 하며, 마을 뒤의 상월리(上月里)로 통하는 고개에는 성황당이 있고 마을 서(西)쪽에는 약물탕이 있다. 위봉산(委鳳山)에 정씨(鄭氏)의 묘가 있는데 옥토망(玉兎望)월형국(月形局)이라는 천하 명당이 이곳에 있다. 앞산에는 붉게 물든 바위가 있는데 이것을 장수바위라 한다. 피식등산에 일선김씨(一善金氏)가 장사(葬事)를 지내는데 마침 한 중이 “그 묘에는 시체가 묻혔구나”하며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지나가는 것을 붙잡아서 결박하고 곤장을 치던 곳을 달아 맨 곳이란 뜻으로 “다름바”라고 한다. 이곳에는 최근세에 경산(敬山)(이형진李馨鎭) 후배 양성을 하던 화동서당(華東書堂)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 마내동, 만의동(晩義洞), 만촌(晩村)
40호의 용궁전씨(龍宮全氏) 집성촌이다. 전성시에는 60호가 넘었으나 농촌인구의 감소는 비단 이곳 뿐 만이 아닐 것이다. 처음 이름은 만의동이다. 등너머 소화리(所華里)에 속한 들 이름이 「마느실」이니 아마 동리 이름과 연관성이 있을 듯하다. 취락이 형성된 것은 약 150년 전이다. 국파(菊坡)(전원발全元發)의 후손(後孫)에 두 효자가 있었는데 동생인 전진광(全震光)의 후예(後裔)들로 타성(他姓)은 없다. 마을 앞에 길다란 논이 있고 거기에 샘이 있는데 대한불갈(大旱不渴)인 이 샘이름이 「천돌네샘」이라고 하며 논이름은 「천돌네샘뱀이」라고 한다. 이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 천돌이가 경작했으리라 짐작된다. 마을 앞에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수령 약 160년을 헤아리며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리(洞里) 수호신(守護神) 동신목(洞神木)이다. 지금은 동제(洞祭)는 지내지 않는다.
이 느티나무는 지보면(知保面)의 보호수(保護樹)이기도 하다. 이 느티나무 아래 「하지백의 샘」이라고 우물이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화주 박이 샘」이다. 화주(華柱)는 솟대의 방언(方言)이니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한 사람을 위하여 붉게 칠한 장대위에 푸른 칠을 한 나무로 만든 용(龍)을 단 것을 박아 놓았던 샘이란 뜻이다.
독립지사(獨立志士) 전병표(全炳豹)의 조부(祖父) 전흥교(全洪敎)가 문과에 급제하였을 때 이 화주(華柱)를 세운 뒤부터 생긴 이름이다.
마을 뒤에 사당(祠堂)이 있는데 흥교(洪敎) 및 병표(炳豹) 등 조손(祖孫)을 모신 사당(祠堂)이다. 또 마을 뒤에는 만의정(晩義亭)이 있는데 전진광(全震光)의 아들 학고(學古) 전세삼(全世三)이 세운 정자(亭子)를 중수한 것이다. 한때 창동의숙(彰東義塾)이라고 하여 신교육(新敎育)과 독립사상(獨立思想)을 고취(鼓吹)하다가 일제 탄압으로 없어졌으나 지보보통학교(知保普通學校) 설립의 촉진(促進) 역할을 하기도 한 곳이다. 만촌(晩村)에서 북(北)쪽으로 등을 넘으면 심불들이 있다. 서애(西厓) 유상국(柳相國)의 맏아들 묘가 괘등혈(掛燈穴)인데 소지명(小地名)이 심불(심지)이니 무척 재미있는 이름이다.
- 구티미, 구태미, 구태(九台)
만촌(晩村)과 구태(九台)는 모두 예전 하월곡리(下月谷里)에 속한다. 만촌(晩村)이 촌락을 형성하기 전에는 구태(九台)를 하월곡(下月谷), 상월(上月)을 상월곡(上月谷)이라 하였다. 최씨(崔氏)와 전씨(全氏)가 같이 사는 혼성촌이며 상월(上月)을 큰마, 구태(九台)를 작은마라고 부르며, 만촌(晩村)을 윗마, 구태(九台)를 아랫마라고 한다. 구티미, 구태미란 어의(語義)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서(西)편으로 내성천(乃城川)이 흐르는데 예전에는 사천(沙川)이라 하였다. 상월(上月), 구태(九台)로 이어지는 들이 있는데 이들을 “양천들”이라 한다. 이는 두 샘(兩泉)이 있는 들이란 뜻이다. 지금은 경지정리로 수리가 좋은 편이지만 예전에는 이 샘이 이 들의 중요한 관개수단이며, 지금도 없어서는 안될 샘이기도 하다. 방입(삿갓 모양으로 된 것인데 상주(喪主)가 쓰고 다니던 것)을 낙동강(洛東江)에 빠트리고 이 샘에 가면 찾는다고 한다. 이 샘 가까이 하지(夏至)샘이 있는데 겨울에 물이 말랐다가 하지(夏至)에 물이 나서 농사에 지장이 없도록 관개(灌漑)에 한 몫을 한다. 예부터 윗구태미와 아랫구태미가 있었다. 이곳에는 근처인 마산(馬山) 그리고 상월(上月), 지보면(知保面)의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심기 노래가 있다. 통명농요(通明農謠)와 비슷하다. 윗구태미를 지나 만촌(晩村)쪽으로 가다가 보면 옥골이 있다. 예전에는 물방아가 있던 곳이라서「물방앗골」이라고도 한다. 이곳에는 고분군(古墳群)이 있는데 그 모양이 특이하다. 석실분(石室墳)으로 장방형(長方形)의 방(房)과 같은 모양의 묘인데 도굴꾼의 소행으로 허물어졌지만 돌로 싼 벽이 남아 있는데 삼국시대(三國時代)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옥골 서남(西南)쪽의 높은 산은 태봉산(胎封山)이라 한다. 이 산 어디엔가 어느 시대의 어느 왕자(王子)의 태(胎)가 묻혀 있다고도 하고 태(胎)항아리는 벌써 뫼구(墓冠)가 가져갔다고도 하나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동남(東南)으로 한참 가다 보면 어화, 구태, 만촌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1,500평 가량의 밭이 있다. 이 밭 서(西)편 한 모퉁이에 선돌이 보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경작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밭 주인(지금 주인이 아님)이 제거를 하였더니 작물이 자라지 않으므로 다시 밭 한 구석에 세웠다고 한다. 어화와 나부산골의 경계에 「나팔고개」가 있는데 지금은 유형무형(有形無形)하나 옛날에는 서울로 통하는 대로(大路)로써 수령(首領)이나 기타 관원(官員)이 이곳을 지나갈 때 실내(室內)(사또의 부인)가 가마에서 내려서 쉬어 가고, 나졸은 호각(號角) 또는 나팔을 불었다고 한다. 범새골에는 예전에 호랑이 새끼가 출몰했다고 한다.
梅倉里
- 본시 용궁군(龍宮郡) 예하면(內下面) 지역인데 창동(倉洞), 매포리(梅浦里), 내포리(內浦里)를 병합하고 매자(梅字)와 창자(倉字)로 동명(洞名)을 삼았다.
- 매아촌(梅花村), 매포(梅浦), 갓골
뒷산이 나부산(羅浮山)이며 그 아래에 매화촌(梅花村)이 있다. 이 말에는 꽃과 나비를 연상하기 십상이지만 전혀 그와는 다르다. 매화(梅花)가 필 무렵에 호접(胡蝶)이 있겠는가.
중국(中國)의 당송대팔가(唐松大八家) 중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의 저서에 용성녹(龍城錄)이란 책이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수(隨)나라 조사웅(趙師雄)이 나부산(羅浮山) 아래 매화촌(梅花村)에서 달 밝은 밤에 몽매간(夢寐間)에 미인(美人)을 만났는데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 매화(梅花)의 요정이었다고 한다. 이곳 어디엔가에 매화낙지(梅花落地)란 명당자리가 있다는데 용궁(龍宮)땅에 매화낙지(梅花落地)라는 말과 용성록(龍城錄)의 매화촌(梅花村)이면 응당 그 뒷산은 나부산(羅浮山)이 바람직하다 하여 이름 붙여으리라. 임란(壬亂)을 전후하여 정희복(丁希福)이란 선비가 이곳에 자라잡은 뒤로 나주정씨(羅州丁氏)의 집성촌(集姓村)이 됐다. 지보면(知保面)에는 접미사(接尾詞) “골”이 붙은 지명은 하도 많다. 매화촌(梅花村)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이곳에 있어서 갓바위가 있어서 매화촌(梅花村)을 갓골이라고도 한다.
- 한여골, 한여라(閑余里)
옛날에 용궁현(龍宮縣)의 원님이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앞세우고 넘나 들었다는 나팔고개 밑에 정씨(丁氏)들이 사는 큰 골짜기에 있고 매화촌(梅花村) 옆에 있는 마을인데 뒷산이 높고 앞이 막혀서 하늘만 보이는 조용한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임란(壬亂) 당시에 해주최씨(海州崔氏)가 한때 정착하였다가 잿마로 이거(移居)했다.
- 창골, 창동(倉洞)
정산봉(鄭山鳳) 밑에 자리잡은 옛날에 민창이 있던 마을이다. 300여년 전에 권기남(權起南)이 개척하여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며, 뒷산 중턱에 50명 가량이 들어 갈 수 있는 동굴이 있어 옛날부터 피난처로 알려져 왔다. 옛날에는 나부산(羅浮山) 아래 용곡암(龍曲菴)이란 절이 있었으며, 임란(壬亂)(1592년)에 삼성(三姓)이 살다가 권씨(權氏)는 이곳에 머물러 있고 정씨(丁氏)는 매화촌(梅花村)으로 옮겨 앉았으며 주씨(朱氏)는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 내골, 내포(內浦)
낙동강(洛東江)변 안쪽의 아늑한 남(南)향으로 큰 골에 있는 50가구(家口) 가량의 공주이씨(公州李氏)의 집성촌이다. 고려말(高麗末)에 감천문씨(甘泉文氏)들이 개척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문감사(文監司)가 개척하였다고 하나 신빙성이 적다. 임진란(壬辰亂)을 전후해서 공주이씨(公州李氏)의 임피현령(臨陂縣令) 진(畛)의 아들 정손(貞孫)의 후손들이 이주해서 살았는데 그 후 문씨(文氏)는 떠나고 없다. 300년 전부터 광주안씨(廣州安氏)의 안정란(安鼎連)과 의성김씨(義城金氏)의 맹암(孟巖) 김영렬(金英烈)의 후손인 김계현(金繼賢)이 서로 전후해서 이곳에 정착하여 현재는 김씨(金氏), 안씨(安氏) 몇 집이 남아있다. 밀양박씨(密陽朴氏)도 거의 동시에 입항(入鄕)하였으나 현재 몇집이 남아있다. 경주최씨(慶州崔氏) 감영김(咸寧金), 이씨(李氏), 정씨(鄭氏), 주씨(朱氏)는 최근에 이거(移居)한 사람들이다.
- 문정자(文亭子)
내골 앞 낙동강변(洛東江邊)의 언덕 위에 널찍한 정자의 주춧돌만 남았으나 여기에 문감사(文監司)가 정자(亭子)를 짓고 살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문정자(文亭子)에 얽힌 숱한 설화가 있는데 강(江) 저편도 역시 문정자(文亭子)로 알려졌으며, 거기에는 강감사(姜監事)라는 이가 역시 정자(亭子)를 짓고 문감사(文監司)와 교분이 좋아서 서로 강을 사이에 두고 배를 타고 넘나들면서 여생을 즐겼다고 한다. 문정자(文亭子)하면 뱃나들이를 말한다. 풍지교(豊知橋)가 생기기 전까지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풍지교(豊知橋)가 생긴 후 부터는 나룻배가 자취를 감추고 문정자(文亭子)란 이름만 남아있다. 강(江) 건너 편 논 가운데 감천문씨(甘泉文氏) 가문의 임난중(壬亂中) 순절(殉節)한 순절삼렬부비(殉節三烈婦碑)가 있어 이 일대에 감천문씨(甘泉文氏)들이 살았었음을 입증한다.
馬山里
- 본래 용궁현(龍宮縣) 내상면(內上面)의 지역으로 말산 또는 마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어화리(漁化里)와 구읍면(舊邑面)의 용포리(龍浦里)를 병합하여 마산리(馬山里)라 했다.
- 말산, 마산, 마산리(馬山里)
마산(馬山)은 현재 60여 가구(家口)가 살고 있으며 조선조(朝鮮朝) 중기(中期) 선조(宣祖) 호성선무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 부사직(副司直) 밀성인(密城人) 박경운(朴擎雲)이 임란(壬亂)때 피난지를 찾아다니다가 마침 지금의 내성천(乃城川)과 낙동강(洛東江) 사이에 있는 산간지(山間地)에 자리잡아 보니 앞산이 나비와 같이 생겨서 나비는 꽃을 좋아하므로 마을 터를 꽃으로 여겨 화산(花山)이라고 칭(稱)하여 오다가 그 후 100여년이 지난 후손들이 마을 주위에 산이 말과 같이 생겼다 하여 말은 용맹한 짐승이라 후손이 용맹스럽고 번창하라는 뜻으로 다시 마산(馬山)이라 개칭(改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당시 마을 입구(入口)에는 삼태(三台) 칠성(七星)의 형(形)으로 된 바위가 마을 남(南)쪽에 한 쌍의 거북과 같은 바위가 있어 마산(馬山) 마을을 지키므로 재해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형체가 뚜렸하게 남았으며, 10여대 후손들이 살고 있다. 한 때 마을 입구에는 안동장씨(安東張氏)와 이씨(李氏)가 번창하게 살다가 지금의 용포(龍浦), 외평(外坪), 천향(泉香) 등지로 옮겨 갔다 한다.
- 완담(浣潭)
지금은 겨우 2가구(家口)가 살고 있다 동래정씨(東來鄭氏)의 선대 묘소가 있으며, 삼수정(三樹亭) 정구령(鄭龜齡)의 묘소도 여기에 있고 갈마음수혈(渴馬飮水穴)이란다. 이곳은 완담서원(浣潭鄕社)가 있던 곳인데 그 유래(由來)는 대략 다음과 같다.
1568년(선조 무진-宣祖 戊辰)에 포내(浦內) 삼수정(三樹亭) 근처에다가 창건했었는데 입향(入享)한 분은 증(贈) 이(吏) 조판서(曹判書) 정구령(鄭龜齡), 흥문관수찬(弘文館修撰) 정옹(鄭雍), 증좌찬성(贈左贊成) 정사(鄭賜)의 삼부자(三父子)를 모셨다. 2년 후인 묘자(廟字)가 낙성(落成)이 되고 위판(位版)을 이안(移安)하였다. 그러나 임란(壬亂)(1292년)에 묘자(廟字)가 불타 버렸으므로 1606년(선조宣祖 39 병오丙午)에 이곳 완담(浣潭) 송계암(松溪菴) 자리에다가 삼위(三位)를 봉안(奉安)하다가 1678년 이곳에 묘자(廟字)를 중건(重建)하고 삼위(三位)를 이안(移安)하였으며. 1685년에는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 정환(鄭渙), 영의정(領議政)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을 추향(追享)하였고, 1764년에는 참봉(參奉) 정영후(鄭榮後), 진사(進士) 정영방(鄭榮邦) 형제를 추향(追享)하여 칠현(七賢)을 봉안(奉安)하였다. 1816년에는 강당인 낙포정사(洛浦精舍)의 준공을 보아 서원으로써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1868년에 은철(撤)되고 위판(位版)은 매안(埋安)하였다. 본래는 송계암(松溪菴)이란 중들이 거처하는 사찰인데 이 중들이 정씨(鄭氏)의 묘소를 수호하였다고 한다. 1879년에 현재의 위치에 완서루(浣西樓)를 세우고 송계암(松溪菴)의 현판을 함께 걸어 놓았다.
- 어와실, 어화(漁化)
임란(壬亂)을 전후해서 촌락이 형성됐는데 본래는 권씨(權氏)가 개척했으나 지금은 각성이 사는 혼성촌이 됐다. 윗마와 아랫마가 있었는데 윗마는 지금은 밭이 되었고, 지금 취락을 형성한 곳은 아랫마이다. 앞산이 국사봉인데 이 산에 방울새가 서식하고 흉사가 있을 때마다 마을에 날와 와서 동민(洞民)에게 알렸다. 동학(東學) 때만 해도 이 방울새 덕을 톡톡히 봤다고 한다. 뒷산에 매오(梅塢) 정영후(鄭榮後)의 묘가 있다. 어화(漁化)란 뜻은 아무도 자세히 모른다. 여기서 동남(東南)으로 나팔고개가 있는데 대은, 지보로 연결되는 한길(大路)이 있었으며, 양지 바른 이 마을은 천봉답일 망정 생곡이 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 큰골, 동녘골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처음으로 윤성경(尹成景)이 개척하였고, 한 때 한우(韓牛)의 사육장으로 각광을 받았었다. 또 왜정(倭政) 때와 해방 후에 못을 팔려다가 실패한 곳이기도 하다. 양쪽에 높은 산이 있고 그 사이로 깊은 골이 있으므로 이름한 곳이며 2가구가 살고 있는 촌락이다.
- 용포동(龍浦洞)
본래는 구읍면(舊邑面)에 속하였던 마을이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지보면(知保面) 마산리(馬山里)에 편입된 마을이다. 삼룡득수형국(三龍得水形局)이라는 이 마을 뒷산이 용비산(龍飛山)이니 용궁현(龍宮縣)의 용비산(龍飛山) 아래 있는 용포동(龍浦洞)이다.
예전에는 우리 고장 사람들이 용궁현청(龍宮縣廳) 즉 관가에 갈려면 이 용포동(龍浦洞) 뒷산을 넘어서 용궁(龍宮)을 다녔는데 산 넘어 동리(洞里)가 성저리(城底里)(성 밑)이고 보면 아마도 이 산이 옛 산성터인가 보다. 그렇다면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소축(所築)으로 된 것이며, 홍건적난(紅巾賊亂)에 안동행재소(安東行在所)로 가기 전에 이 산성에 머물다가 용포동(龍浦洞)을 지나 갔을지도 모른다. 문경군(聞慶郡) 영순면(永順面) 왕태리(旺泰里)에 공민왕(恭愍王)이 지나 갔다는 왕의산(王衣山)이 있기에 말이다.
마산(馬山)에 살던 안동장씨(安東張氏)는 새로운 기지를 잡아서 장복희(張復熙)(1845~1912)가 개척하였다고 하니 100년 가량된 듯하다. 수령 100년을 넘는 느티나무는 동리(洞里) 형성과 해가 같으며 동신목(洞神木)으로 마을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마산(馬山)에 있던 남오(南塢) 장신립(張信立)의 사당(祠堂)을 1965년에 이곳으로 이건하였고, 남오정(南塢亭)도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마을 앞에는 농촌전화사업(農村電化事業)으로 지보면(知保面)에서 가장 오지(奧地)인 이 마을에까지 전기(電氣)를 끌어 들인 장석도(張錫度)의 공덕비(功德碑)가 서 있다. 와룡당(臥龍堂)도 이곳에 있다고 한다.
조대박골은 1870년 이전까지도 이씨(李氏)들이 살았고, 또 외막실, 빈소골, 중상골, 질매골 등 숱한 설화가 담긴 골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 마을은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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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22.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