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연혁
- 신라시대 : 고림리 부근에 당동현(堂洞縣) , 고림부곡(高林部曲)
- 고려시대 : 보주군(甫州郡), 양양군(襄陽郡)에 속함
- 조선시대 : 예천군(醴泉郡)에 속함
- 1914년~ : 지서아(只西牙), 당동(堂洞) 유등천(柳等川) 3개면을 병합하여 유천면
유천면은 군의 서부에 위치하며 국사봉과 꽃재가 뒤를 감싸고 면의 중앙을 유등천(중평천)이 흐르며 곡창지대가 형성되어 취락을 이루며 20개동에 2,500여명이 거주한다.
신라시대에는 당동현으로 고림에 현청을 두었고 고려말엽에 용궁현에 속했으나 이조 세종때 예천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버드내가 있으므로 유등천면(柳等川面)이라 하였다.
| 유등천의 봄 | 유천평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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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등천면은 가리(街里), 화지(花枝), 고산(孤山), 광전(廣田), 손곡(蓀谷), 후평(後坪), 성주(星州), 장기(場基), 손동(蓀洞)의 9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부군면(府郡面) 폐합에 따라 당동면(堂洞面)의 고림(高林), 율현(栗峴), 매산(梅山), 퇴치(退治), 송내(松內), 지곡(池谷), 망정(望亭), 연화(蓮花), 한천(寒泉), 용암(龍岩), 초적(草笛)의 11개 동리와 지서아면(只西牙面-只西, 岐西里)의 마천(麻川), 사곡(沙谷), 송전(松田), 청송(靑松), 죽안(竹岸), 중평(中坪), 화전(花田)의 7개 동리와 개포면의 금동, 문경시 화장면의 흑송리를 일부 병합(倂合)하여 유등천면의 이름을 따서 유천면(柳川面)이라 하였다.
현재는 가리, 고산, 고림, 광전, 마천, 매산, 사곡, 성평, 손기, 송지, 수심, 연천, 용암, 율현, 죽안, 중평, 초적, 화지, 화전의 20개리로 개편 관할하고 있으며, 동쪽은 예천읍과 용문면, 남쪽은 개포면, 서쪽은 개포면과 문경시 산북면, 북쪽은 용문면과 문경시 동로면에 접하고 있다.
특산물은 유등천(중평천)을 따라 형성된 손기 돗들 고산 오미들 성평 성지버들, 화지봇들 등 유천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친환경우렁이쌀과 송전, 중평, 손기, 화지, 매산, 가리 등 시설하우스에서 재배되는 풋고추와 오이가 유명하며 한우, 땅콩도 유명하다.
주요 시설은 연천리와 매산리 일원에 걸쳐 대한민국 영공방위 수호를 위하여 1976년 창설된 『공군제16전투비행단』이 위치해 있으며 1967년 농업용으로 축조된 중대형 『죽안저수지』가 있다. 또한 죽안저수지 주변에는 사계절 다양한 농산촌 체험이 가능한 『국사골다목적체험관』 있어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다.
『화지리(花枝里)』 이야기
지명유래
- 임진왜란 이후 오미(고산)에 터를 잡았던 윤문(1547-1628)의 후손들이 조선 제21대 영조25년경(1749년) 개척한 마을로 지형이 매화가지 처럼 생겼고 마을 앞 유등천에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목화재배도 성하여 화지라고 하였다.
자연마을 등
- 【고절/고지월】 화지 동쪽에 있는 마을로 달이 질때는 뒷산 때문에 달그림자만 남기고 빨리 져버린다 하여 고지월이라 하였다.
- 【남산/남산마】 화지 남쪽 산 밑에 있는 마을
- 【여무쟁이】 남산 앞에 있는 골짜기
- 【골마】 중마 뒤 골짜기에 있는 마을
- 【중마】 화지마을 중앙에 위치한 마을
- 【연무장】 남산마의 남쪽을 흐르는 화초천 냇가 모래벌판에 있는 들로서 옛날 명절에 이곳에 모여 씨름하던 곳이며 지금은 농토로 변하였으며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 화지와 고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 이야기도 전해오는 곳이다.
- 【봇들】 마을 앞 유등천(중평천)을 따라 형성된 넓은 들판, 웃봇들, 아랫봇들이 있다.
- 【시미끝】 화지 봇들과 고산 오미들 가운데 위치한 들
- 【성깨】 유등천(중평천) 너머 지내리 쪽에 형성된 들판
- 【건논골】 성깨들 건너 골짜기에 있는 들
- 【불숭골】 건논골 옆에 있는 골짜기에 있는 들
- 【내봉재】 불숭골 너머 지내리 쪽에 있는 들
- 【살뜨리】 화지 동쪽에 있는 들
- 【장승배기】 경북선 철길 건너편 금동 쪽에 형성된 들
- 【배징개】 장승배기 고개너머 금동쪽에 있는 들
자랑거리
【 화남재(花南齋) 】
화지리 205번지에 있는 화남재는 고려16대 예종 때 여진을 정벌한 문숙공 윤관(1050∼1111) 도원수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1956년 공의 16대손인 화음공 윤문의 낙향정착지인 화지리에 파평윤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윤관은 고려 문종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104년 동북면행영병마도통사가 되어 고려의 변방을 침범하던 여진을 정벌하였다. 이때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창설하였으며 예종2년(1107) 대원수가 되었고 부월을 하사받고 여진을 정벌하였다. 이 정벌에서 고려군은 여진을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 몰아내고 9성을 축조하였으며 선춘령에 고려정계비를 세웠다. 윤관은 4차에 걸쳐 여진 정벌을 하였으며 북방의 백성 75,466호를 점령지에 이주시켜 생활의 안정을 영위토록 하였다. 관직이 문화시중에 이르렀고 문무를 겸전한 공신이다. 묘는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여층사 경내에 있다. 화남재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0일이면 화지리 파평윤씨 후손들이 모여 춘제를 봉행하고 음복을 나누며 공의 뜻을 기린다.
| 화남재 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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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우각(孝友閣)】
윤필경(1810~1855)과 조카 치각(1822~1855), 치락(1833~1855) 삼숙질의 효와 우애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정려하여 1867(고종4년) 건립되었다.
조선조 25대 철종 6년(1855) 음력 7월 3일 폭우가 쏟아지자 윤필경은 형님을 모시고 장조카 치각, 차조카 치락을 데리고 논물을 보러 갔다. 갑자기 제방이 터져 형이 물에 떠내려 가자 치각과 치락이 부친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 들었고 이에 필경이 놀라 울부짖으며 달려들어 형은 구했으나 정착 본인은 조카들과 함께 운명하게 되었다. 삼숙질의 묘는 가산에 썼으며 당시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들의 혈육간 우애를 높이 기려 조선 1865년 통정대부 이조좌랑에 증직됨과 아울러 효우각도 세워지게 되었다.
효우각은 화지 동네 입구에 위치해 있으며 동신제를 올리는 느티나무도 주변에 있어 화지리 마을의 상징이기도 하며 오가는 후손들과 길손들도 그들의 효와 우애에 존경을 표한다.
| 화지리 효우각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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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리(孤山里)』 이야기
지명유래
- 마을 앞들 가운데 있는 외딴 산을 고산이라 하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음.
- 이 마을 동신제문에 의하면 진주강씨가 처음 개척하였으며 그후 임진왜란(1592년) 때 파평인 화음공 윤문(1547-1628)이 이곳에 내려와 살다가 마을 앞 들 가운데 외딴 산을 독산 또는 오미봉이라고 하는데서 마을 이름도 독산 또는 오미라고 하다가 1850년(철종1년) 고산이라 하였다.
자연마을
【오미/五美】
- 봄에 피는 버들꽃 柳花春霧 (류화춘무)가 一美요,
마을을 안고 도는 유등천 시냇물 溪水抱流 (계수포류)가 二美요
오미봉에 지는 가을 달 小尾秋月 (소미추월)이 三美요,
중미산 나뭇가지에 핀 눈 꽃 中山雪松 (중산설송)이 四美요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싼 묏부리 巒山環屛 (만산환병)을 가르켜 五美라고 하며 동네이름도 오미(五美)라 하였다. - 【독산 / (孤山)】 : 오미 앞들 가운데 있는 외딴 산
- 【대망골】 오미 서쪽에 있는 마을, 오랜 옛날 대망(大望)이 승천을 기다리며 숨어 살았다고 함
- 【오미들 / 사당재들】 : 오미 앞에 있는 들, 사당재들이라고도 함
- 【황골】 : 장삿골 옆에 있는 큰 골짜기
- 【황골못】 : 황골 옆에 있는 못
- 【장삿골】 : 황골 옆에 있는 큰 골짜기
자랑거리
【화음공 윤문 유허비(遺墟碑)】
선조25년 임진란으로 예천으로 낙향하셨다. 도지(圖誌)를 상고(詳考고)한즉 고산은 용궁군 당동현 유등천면 오미동이다.
즉, 柳花春霧 (류화춘무)가 一美요, 溪水抱流 (계수포류)가 二美요
小尾秋月 (소미추월)이 三美요, 中山雪松 (중산설송)이 四美요
巒山環屛 (만산환병)이 五美이므로 동네이름을 오미(五美)라 하였다.
오미마을 1850년 철종 원년 경술에 행정구역개편으로 고산이라 개칭하였다. 고봉남단에 터를 여신지 400여년에 이르렀다. 1700년대에 화지로 분기하여 후손이 700여세대에 이른다. 서기 1626년 인조6년 무진 10월 4일에 세상을 버리시니 향년 84세셨다.
서기 1642년 인조 20년 임오에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시었다. 험난한 생애와 청고한 덕업을 기술하신 유묵이 여러차례 병화로 소실되어 애석하였는데 다행히 옛날 고서에서 약간의 자료를 얻었기에 돌에 새겨 전하려고 옛터에 1981년 10월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전설/설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오우가(五友歌)의 유래】
옛부터 경상북도 북부지방 즉, 소백산맥(小白山脈) 아래 영주, 봉화, 예천, 문경, 상주 지방은 조선 중엽이래 유학(儒學)의 본거지인 동시에 남인(南人)들의 본거지였던 터라 남인계(南人系) 사림(士林) 거유(巨儒)들의 은거(隱居) 또는 내왕(來往)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들 남인계의 거유 사림들의 내왕 흔적들 중 참으로 기이하고도 신기한 일은 이 곳 유천(柳川)의 「고산리 오미동(孤山里 五美洞)」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불후의 명시조(名詩調)인 “오우가”(五友歌) 중
“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의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삿밧긔 또 더하야 머엇하리 “
의 작사 현장이라고 하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조선 중엽 1587년(선조 20) 서울에서 예빈시 부정(副正)을 지낸 해남(海南) 윤씨(尹氏) 유심(惟深)의 아들로 태어나 종가댁(宗家宅)과 숙부(叔父) 유기(惟幾)의 양자(養子)가 된 후 1671년(현종 12) 85세의 생애(生涯)를 마쳤다. 그의 나이 26세에 진사(進士) 초시(初試)의 수석합격을 시발로 승보시, 별시 문과 초시, 중광 문과 등에서 그 때마다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여 대군(大君)들의 사부, 공조 좌랑, 형조 정랑, 동부승지 등의 관직(官職)을 지냈으나, 그는 남인계로서 치열한 당파(黨派)싸움에 휘말려 세 차례나 다섯 곳에 걸친 20여 년 간의 유배생활(流配生活)과 19년 간의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하면서 무려 75수(首)에 달하는 단가(短歌)와 시조(時調)를 창작(創作)하였는데, 그 중 그의 나이 53세(歲)쯤 유배지 명덕에서 풀려나 56세 때 해남(海南) 김소동(金消洞)에서 지었다는 『오우가』의 작사 현장이 바로 이 곳 유천 「고산리 오미동(孤山里 五美洞)」 일대의 자연경관을 보고 지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심증을 보면,
첫째, 고산(孤山)이라는 아호 또한 이곳의 지명「고산(孤山)」과 일치한다.그의 나이 26세 때 진사 초시에서 이미, “눈속을 무릅쓰고 고산을 찾다(冒雲訪孤山)”이라는 시제로 장원하였던 바 그의 유배지와 은거지 및 모든 작품으로 미루어 볼 때 아호 「고산」과 그가 일생동안 이상향(理想鄕)으로 그려 온 이 곳과 사이에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가 있는 듯 하다.
둘째, 이 시조 「오우가(五友歌)」의 제목과 내용이 이 곳 오미동(五美洞)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던 “류화춘무 계수구류 소미추월 중산운송 만산환병” (柳花春霧 溪水拘流 小尾秋月 中山雲松 巒山環屛)이라는 작자 미상(尹善道 일 수 있음)의 오우가(五美歌)의 제목 및 그 내용이 지극히 유사한 점이다. 다시 부연하면 「오우가」는 위에 소개한 바와 같이 작자의 주변환경, 즉 대자연의 산천(山川)과 초목(草木)들 중 물(水)과 돌(石), 소나무(松), 대나무(竹), 및 달(月) 등, “오우가”의 물(水)와 돌(石)은 오우가의 「계수」(溪水)와 벽산의 바윗돌이고, “오우가”의 소나무는 「오미가」(五美歌)의 운송(雲松)이며, 오우가의 달(月)은 오미가(五美歌)의 가을달(秋月)이라고 한다.
셋째, 유천의 「고산리 오미동(孤山里 五美洞)」과 그 주변에는 특히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송전(松田), 초적(草笛), 송곡(松谷)의 소나무와 대나무를 비롯하여 북쪽의 꽃재, 회압재에서 발원하여 동남방으로 흐르는 유등천(柳等川) 주변(周邊)에는 오우가의 다섯 벗이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은거생활로 지금의 경상북도 북부지방을 찾아다니던 중 낙동강(洛東江) 어느 지점(내성천과 한천이 만나는 서울 나들이 부근이라고 추정 됨-예천군 개포면 경진리 부근)에서 강물을 찍어 맛을 보고 그 상류지역에 천하의 명당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감지하고, 그 물줄기를 따라 이 곳 오미동까지 도달해 보니 지금 이 곳 고산(孤山), 화지 두 동네에 약 200여 호나 집거하고 있는 파평(坡平) 윤씨 중시조(中始祖)인 윤문(尹汶)의 유허비(遺虛碑)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가 명당(明堂)임에는 틀림 없으나, 그 자리에 이미 정체 미상(未詳)의 사당이 한 채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되돌아갔다는,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說話)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옛날의 오미동이 지금은 많이 변화됨에 따라 사진으로 그 아름다움을 담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자료는 고산 윤선도 선생의 종손(宗孫)인 해남의 윤형식(尹亨植), 고산의 후손으로서 정통(正統) 고산 연구가인 윤승현(尹承鉉)이 응해 주었다
(1998년 전 보사부차관 이두호 님 글 발췌)
『성평리(星坪里)』 이야기
지명유래
- 고려시대에는 안동권씨가 크게 영화를 누리고 살았는데 고려 충선왕때 정승 예천부원군 권한공과 조선 태종때 영의정 예천백 권중화 등의 집이 이 곳 후평에 있어서 삼정승 팔달관이 나왔다고 하여 삼덕 팔달을 칭송하여 마을이름도 덕달(德達)이라 하였다.
- 고려사, 태조,태종실록, 국조인물고, 예천군지 등에도 이야기가 전해지며 지금도 이 마을이름은 ‘덕달 (덕다리)’로 많이 불리운다.
- 그후 18세기 전반에 순흥안씨가 들어왔고 1840년경 경주이씨가 고산에서 성지버들로 옮겨와 살다가 성주동이라 하다가 다시 덕달로 이거하였다.
- 1914년 성주동(星州洞)과 후평동(後坪洞), 그 2동를 병합하여 이름을 따고 성평동(星坪洞)이라 하였다.
자연마을
- 【덕다리 / 덕달(德達)】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인데 우리나라 지도와 흡사하다. 덕다리 중에서도 아래쪽에 있어서 앞걸, 뒤쪽에 있어 골마 개울을 건넜다 하여 뒷걸 등의 지명이 있다.
- 【뒷들(後坪)】 마을 앞에 넓은 들이 있고 유등천이 흐르며 성평동에서 보면 뒷산을 돌아가므로 뒷들이라 한다. 원래 마을의 동서로 도로가 관통하여 그 양쪽에 마을이 있었으나 광복후 길 아래는 농경지로 변하였다.
- 【성지버들】 성줏골 앞에서 고산까지 연결되는 들판
- 【부처집골】 성줏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돌부처를 모신 집이 있다.
- 【불미골】 성줏골 서북쪽에 있으며 부처집골 위쪽 골짜기
- 【불당골】 성줏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불당이 있었다.
- 【덕고개골】 불당골과 입숭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
- 【입숭골】 덕고개 왼쪽 옆에 있는 골짜기
- 【백갈골】 성평과 석정 경계에 있는 골짜기
- 【백마산 (白馬山)】 성평 마을 뒤에 있으며 백마를 닯았다고 하여 백마산이라고 한다.
- 【빌두산(星斗山】 성줏골 앞에 있는 산
- 【성평8경 (星坪八景)】백마산(白馬山) 불곡산(不曲山) 봉화산(烽火山) 빌두산(星斗山)을 산사경(山四景)이라 하고 거북바위, 두꺼비바위, 노적바위, 뱀바위를 바위사경(巖四景)이라 하며 합하여 성평8경이라고 하였다.
자랑거리
【이장서 처 경주최씨 효열각 (李章瑞 妻 慶州崔氏 孝烈閣)】
성평리 451번지 덕달마 입구에 있으며 1884년(고종21년)에 증 사헌부 감찰 이장서의 처 경주 최씨에게 정려된 목조와가 비각이다.
이장서공에게 출가한 최명홍의 딸 경주최씨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어린 외아들 병욱을 기르며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는데 시아버지가 앓아 눕게 되자 효험있는 약을 얻게 해달라고 정성껏 빌었더니 두 마리 뱀과 거북이 짝을 이루어 나타나 그것으로 시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드렸다. 그 효열에 감동하여 관가로 글을 올리니 정려를 명하였다고 한다.
【소초 엄병교 선행비 (小蕉 寧越嚴公 炳敎 先行碑】
성평리 산 15번지에 있으며 고을 사림에서 1960년 5월에 그의 뜻을 기려 건립하였다. 엄병교(1835~1944)공은 충의공 영월인 엄흥도의 후손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말과 행동이 충성스럽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남달랐으며 몸가짐이 삼가하고 신중하여 이웃 사람들이 모두 그를 ‘군자다운 사람’이라고 하였다. 선생에게는 영교씨와 정교씨 두 동생이 있었는데 영교씨는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그 부인 노씨는 유복자와 다름없는 종칠군을 키우느라 무척 고생했는데 소초공은 친자와 다름없이 조카를 돌봤다. 그리고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 두 아우를 위하여 농우 한 마리를 사 주어 서로 교대로 부리게 했는데 서로 양보하지 않더니 어느날 중간 제수씨와 동생 및 아들과 조카 등이 서로 다투자 집안을 잘 돌보지 못한 자신에게 허물이 있다하여 근력이 쇠한 어머니를 대신하여 자신의 부인에게 자신을 매질하여 줄 것을 청하고 눈물을 흘리니 동생의 무리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게 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공은 92세까지 장수하며 후학양성에도 힘써 박흠호씨 외 여러 사람을 길러냈다.
【유은정(柳隱亭】
성평에는 1840년경 경주이씨가 들어와 현재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정릉참봉을 지낸 경주이씨 국당공파 38세손 유은 이우호(1889~1930)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아들 재익이 1936년 유은정을 건립하고 이후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며 문중원들이 모여 대소사를 논하고 조상의 유덕을 기리는 장소로 이용되며 그 주변 경관 또한 아름답다.
현재는 후손 이기철 씨가 사비를 들여 주변을 크게 확장하고 경관을 정비하여 공원화함으로써 명실공히 덕달 마을의 명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 유은정(柳隱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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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설화
【조선 초(朝鮮初) 예천백(醴泉佰)이 된 명재상(名宰相) 권중화(權仲和)】
권중화(權仲和, 1322~1408)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학자, 문신, 자는 용부(容夫), 호는 동고(東皐), 시호는 문절(文節), 본관은 안동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한공(漢功)의 아들로 조선 태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여 대언(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고, 1390년(공양왕 2)에 이초의 옥(彛初의 獄, 尹彛와 李初가 반란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 나와 다시 문하찬성사,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 등을 역임했다. 조선 개국(開國, 1392) 후 판문하부사(判問下府使)에 올랐고, 1394년(태조 3) 2월 동국역대제현비록촬요(東國歷代諸賢秘錄撮要)를 편찬했다. 1396년(태조 5) 명(明)나라가 조선(朝鮮)에서 세공(歲貢)을 적게 바친다고 트집을 잡아 문책해 왔으므로 이에 당황한 조정은 그로 하여금 사은사(謝恩使)로 보냈다. 이에 명나라에 간 그는 우리가 바친 세공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고 정성을 다한 것이므로 더는 바칠 수 없다고 조리 정연하게 진술하여 명나라 황제 태조로 하여금 감복케 하였다. 나라를 걱정하는 진정한 사신이란 칭찬과 함께 세공을 더 줄 수 없다는 확약을 받고 돌아 왔으니, 백성들로 하여금 세금에 허덕여 도탄(塗炭)에 빠지지 않고, 민심을 바로 잡는 한편, 국가 재정(財政)이 파탄에 이르지 않도록 난국을 타개하여 조선 건국 초에 기틀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하겠다.
그 후 1407년(태종 7)에 영의정이 되고 이어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다. 그의 공적은 나라를 빛낸 공이 클 뿐만 아니라 6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고장의 큰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근검(勤儉), 청렴(淸廉)하고 사물의 판단에 조리가 분명하여 만 백성들로부터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고 초연했다. 또 의학, 지리, 복서(卜筮)에도 통달했으며, 글씨에도 능하여 전서(篆書) 팔품체(八品體)를 잘 썼다. 지금도 창암사 나옹화상비(양주), 광통보제사비의 전액(개성)에 그의 작품이 남아있다.그의 고향 덕달(德達)의 유래는 고려와 조선을 통해 가문과 마을을 번창하게 하였다하여 일컫게 되었다. (고려사, 태조,태종실록, 국조인물고, 조선불교통사, 예천군지)
【이장서의 처 경주최씨 효열】
성평리(星坪里)는 경주(慶州) 이씨(李氏) 집성촌(集姓村)이다.
경주(慶州) 이씨 이은(李隱)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그 중 셋째 아들이 이장서(李章瑞)이며 셋째 며느리는 경주(慶州) 최씨(崔氏)이다.
셋째 며느리는 21세에 남편을 잃고 외아들을 기르면서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셨는데, 시아버지께서 중병(重病)으로 수 삼년을 눕게 되자 매일 병간호를 하면서 영험이 있는 약을 구해달라고 지성(至誠)으로 하늘에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서들과 앞개울에 빨래를 하러 갔다가 두 동서가 먼저 집에 들어가고 효성이 지극한 셋째 며느리만 남아서 빨래를 계속하던 중 갑자기 2척(尺)이 넘는 잉어가 치마폭 안으로 올라오기에 잡아서 병(病)으로 누워 계신 시아버지를 봉양(奉養)하였고,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복숭아가 먹고 싶다는 시아버지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다래끼를 메고 산으로 가던 중 덕고개에서 복숭아를 얻었으니, 효성(孝誠)이 지극한 며느리를 위해 산신령(山神靈)이 내린 복숭아라 했다.
또한 엄동설한에 난데없이 뱀 두 마리와 거북 한 마리가 나타나 이것을 시아버님께 드렸는데 병이 완쾌(完快)되기도 하였다.
그 후 시아버님이 운명(殞命)하게 된 저녁에 셋째 며느리에게,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다하고 간다”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한다.
1884년(광무 3) 성균 진사 이씨가 이를 임금께 고하여 어명으로 마을 입구에 효열각(孝烈閣)을 세우게 하여 정려(旌閭)됐으며, 지금도 그 단청(丹靑)이 선명하다.
『광전리(廣田里)』 이야기
지명유래
- 임진왜란(1592)때 가평인 이춘백이 피란와서 살 때 넓은 평원이 손기리까지 뻗쳐 있었다 하여 넓은 밭이라는 뜻으로 너밭(광전)이라고 하였다. 병자호란(1636) 후 서울에서 피란온 참판공 남양 홍만적(1660~1733)이 다시 개척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당골, 마람터, 손동 일부를 병합하여 광전동이라 하였다.
- 【너밭】 마을 주위에 넓은 들이 펼쳐져 너밭이라고 불리어 지며 너밭에서 연유하여 한자어로 이 주변 마을을 합쳐 행정구역상 광전(廣田이)라고 부른다.
- 【용마람터/마람터】 마을 앞에 용 모양의 큰 바위가 있어 장사의 용마가 태어날 터라고 하여 용마람터라고 부르다가 용마람터의 용자를 빼고 후세에 와서 마람터라고 부른다.
- 【서당골】 너밭과 마람터의 북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남양홍씨 집성촌이다. 원래 광전서당이 있었던 곳인데 없어지고 조선말엽에 다시 홍환유가 서당을 차려 글을 가르치던 곳이다. 마을 서쪽 골짜기에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하여 절골이라고 부르는데 밭 언덕에서 기왓장 조각이 발견된다.
- 【새터】 조선 말엽 동래 정씨가 새로 개척하여 형성한 마을
- 【호요골】 서당골과 새터사이에 있는 골짜기
- 【딴등】 너밭 서남쪽에 있는 마을
- 【들미산밑】 들미산 밑에 있는 마을
- 【반송재】 서당골 북쪽에서 용문면 방송리로 넘어가는 고개
- 【무리피재】 서당골 북서쪽에서 수심리로 넘어가는 고개
- 【덕바우재】 서당골에서 용문면 덕신리로 넘어가는 고개
- 【못골】 절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작은 못이 있는 곳
- 【진실개】 너밭 남서쪽에 있는 들
- 【마람들】 마람터 앞쪽에 있는 들
자랑거리
【유천구곡 (柳川九曲)】
광전출신 용강 정원하(1866∽1737)선생이 1914년 지었으며 용강유고에 기록이 남아있다. .
현재 용강유고는 용강선생의 후손인 정희융(전 예천문화원장)이 소장하고 있다.
유천구곡(柳川九曲)은 유등천(현 중평천)따라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것으로 다음과 같다.
| ① 一曲 / 麻川 (마천) | ② 二曲 / 明堂谷(명당곡) | ③ 三曲 / 中坪 (중평) |
| ⓸ 四曲 / 蓀谷 (손곡) | ⑤ 五曲 / 道坪(도평) | ⑥ 六曲 / 龍巖山 (용암산) |
| ⑦ 七曲 / 星斗巖(성두암) | ⑧ 八曲 / 孤山 (고산) | ⑨ 九曲 / 花枝 (화지) |
선현들이 명승 경치를 찾아 노래한 예천의 구곡은 유천면의 유천구곡과 더불어 감천면의 수락대구곡, 은풍면의 은계구곡, 풍양면의 삼강구곡이 전해진다.
전설/설화
조선 말엽 광전 남양 홍씨 문중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나자마자 다락 위로 뛰어 올라가며 말도 하고 눈은 쌍동자이며 치아가 모두 났으며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용바위에 용마가 나타나자 이 소식을 들은 아기 외가에서는 장수가 나면 역적으로 몰려 외가까지 망한다고 달려와서 아기를 챗돌로 눌려 죽였는데 이 아기는 챗돌에 눌려서도 일주야를 울며 견뎠고 이 때 용마도 함께 슬피 울다가 하늘로 올라 갔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 홍씨들은 이 아기를 죽이지 않았다면 큰 장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한다.
『손기리(蓀基里)』 이야기
지명유래
- 조선 제7대 세조8년(1462) 예안인 김자가 개척하고 뒷산에 향기로운 손초(난의 일종)이 많아 손골(손동)이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손골과 장터가 있었던 장기를 병합하여 손기라 하였다.
- 【손골/蓀谷】 손기 뒷동산에는 예로부터 산 난초가 만발하여 그 향기가 유천 전역에 풍기어 손곡(蓀谷)이라 불리어져 오고 있다.
- 【서당마을】 통정대부(정삼품)이신 반남박씨 여복공께서 학문과 예의를 숭상하고 시문으로 유유자적하면서 이곳에 터를 잡으셨다. 특히 공께서는 벼슬보다 후진양성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학문과 덕을 밝히고자 이곳에 처음 손곡서당을 창설하면서부터 서당마을이라고 부른다. 서당마와 뒷산 전체가 공의 소유로 후손들에 의해 지켜져 오고 있다. 공께서 돌아가신 수십년 후에 의성 김씨, 유계공과 춘파공께서 각기 서당을 재건하여 훌륭한 덕망을 샀다. 손기동은 예부터 예안 김씨과 반남 박씨 양 가문이 세거하면서 예의와 학문을 숭상하고 실천하면서 밤낮으로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 선비의 맥이 지금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다.
- 【장터】 조선시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3일·8일 오일장이 열리던 장터 마을
- 【쏘방마】 손골 서쪽에 소(沼)가 있었는데 자연 매몰되고 그곳에 형성된 마을
- 【장등마】 손골 동쪽 골짜기의 장등성에 있는 마을
- 【강아지골】 너분들 옆에 있는 골짜기
- 【거먹실골】 손골 서북쪽에 있는 높은 산 밑 골짜기
- 【골마】 손골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 【건너마】 손골 건너에 있는 마을
- 【너분골】 손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논골】 강아지골 옆에 논이 있는 골짜기
- 【빈솟골】 논골옆에 있는 골짜기
- 【돗들】 손골 남쪽에 있는 광전리까지 펼쳐진 넓은 들
자랑거리
【손기장터】
조선시대부터 장이 섰으며 마을을 포근히 감싸 흐르는 내 이름을 따라 유등천장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서히 ‘손기장’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3일 8일 오일장이 섰다. 시장거리를 중심으로 늘어선 시전(市廛)과, 소와 말도 사고파는 우시장도 설 만큼 규모가 컸으며 오일마다 주민들이 안부를 전하며 흥성거리던 사람 냄새 물씬 풍기던 장터이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손기장은 1979년 공식적인 오일장이 폐쇄되고 이후에도 어물전, 생필품 등 노전이 펼쳐지며 80년대까지 명맥을 이어왔으며 지금도 주민들은 여전히 ‘손기장터’라고 부른다.
【댕댕이봉】
이름도 예쁜 ‘댕댕이봉’은 예천읍 흑응산 ~ 봉덕산 ~ 봉화산 ~ 댕댕이봉 ~ 손기장터 까지 이어지는 9.7km 구간의 등산로에 끝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댕댕이봉 꼭대기에는 산불 등 재난시 활용할 수 있는 헬기장과 유천면 산불감시초소가 우뚝 솟아 있다
댕댕이봉 정상에 서면 국사봉에서 시작되는 국사지맥 줄기와 유천평야 그리고 옹기종기 모였있는 정겨운 버드내 스무 마을 관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명소이다.
| 댕댕이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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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리(水深里)』 이야기
지명유래
- 원래 지만사가 있었던 곳으로 임진왜란(1592)을 전후하여 김해김씨가 지만사 근처 산위에 마을을 개척하였고 이곳은 화기가 있어 불이 자주 일어나므로 그 산아래 물이 깊게 괸것(수심)같은 지형을 찾아 음지쪽으로 마을을 옮겨서 음지마을이라고도 하고 물이 불을 이긴다는 오행설에 따라 무리피(수심)이라 함.
- 1730년(영조6) 무리피 후손이 지만사 터에 새로 마을을 개척하여 지만이라고 함.
자연마을
- 【무리피】 김해 김씨가 개척할 당시 앞산에 화기가 있어 불이 자주 일어나므로 지금의 마을로 옮겨 왔으며 우물 맛이 좋기도 하지만 물이 불을 이긴다는 오행설에 따라 마을이름을 무리피라고 지었다고 하며 그 후에 전주이씨가 들어왔고 곤산 배씨 23세손 배윤이 정착후 500여년간 배씨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 【지만】 옛 지만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1730년(영조6년)경 무리피에 살던 후손들이 새로 마을을 개척하고 지만이라고 하였으며 현재 김해 김씨와 경주 최씨가 살고 있다.
- 【양지마】 무리피 건너 양지바른 마을
- 【방구모리】 무리피 서쪽에 있는 모퉁이에 큰 바위가 많이 있고 바위 사이에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매년 정월 보름 동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 【강변】 찬샘 동쪽에 있는 마을
- 【고사리골】 무리피 동쪽에 있는 골짜기, 고사리가 많이 난다.
- 【고사리재】 고사리골 뒤에 있는 고개, 큰 느티나무가 있다.
- 【도래】 움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돌깨】 움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돌이 많다.
- 【골안】 양지골 남쪽 안에 있는 골짜기
- 【오미기】 무리피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움골】 공사들 북쪽에 있는 골짜기, 움집이 있었다.
- 【재궁골】 양지마 북쪽에 있는 골짜기, 김씨의 재궁(재실)이 있었다.
- 【종경지】 양지마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진등】 골안 서쪽에 있는 긴 등성이
- 【찬샘골】 오미기 남쪽에 있는 찬샘이 있는 골짜기
- 【도독골】 무리피 서쪽에 있는 골짜기
- 【공사골】 돌개골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
- 【돌개골】 공사골 위쪽에 있는 골짜기
전설/설화
【지만에 얽힌 이야기】
마을의 뒤편에 두리봉산이 있는데 옛날에는 이 산의 능선에 큰 소(沼)가 있었고 깊이는 헤아릴 수 없어 그 바닥이 손기 장터 앞개울까지 닿았다고 하는데 하루는 마을 처녀가 소를 먹이러 갔다가 소와 함께 이 소(沼)에 빠져 죽자 그 뒤로 마을 사람들이 돌을 날라와서 소(沼)를 메워 버렸다는 전설이 있으며 소(沼)가 돌로 가득차서 마을 이름을 지만(池滿)이라 했다고 한다.
【고사리재】
고사릿골 뒤에 있는 고개이며 조선말엽 이가인 양주대감이 한양 왕래시 이 고사리재를 넘었으며 이곳에는 큰 느티나무와 넓은 바위가 놓여 있어 길손들이 쉬어가는 세곳의 정자 중 한 곳으로 유명하다.
『송전리(松田里)』 이야기
지명유래
- 본래 지서아면 지역으로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개척당시 마을 주변에 큰 솔밭이 있었으므로 솔밭 또는 송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 18세기 초 인동 장씨들이 지심을 개척하였고 18세기 후반 영일정씨들이 명당골을 개척하였으며 18세기 말에 영일 정씨들이 새마를 개척하였다.
자연마을
- 【새마】 18세기 말에 영일정씨가 새로 개척하여 새마라고 하였으며 송전리에서 가장 큰 마을
- 【명당골】 18세기 후반 영일 정씨들이 개척한 마을로 옛날 이 골에 절이 있었는데 많이 사람들이 발원한대로 이루어졌으므로 명당자리에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명당골이라고 부른다.
- 【지심(池深) / 아랫마】 명당골 동쪽 아랫마을이며 옛날에는 솔밭이라하였으며 18세기 초 인동장씨들이 마을을 처음 개척할 당시 작은 못이 있었는데 아주 깊었다고 하여 지심이라고 부르며 또한 일설에는 지심사라는 절터에 생긴 마을이라고도 한다.
- 【곡골】 새마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동녁들】 새마 북동쪽에 있는 들
- 【땍바른골】 새마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남쪽이 트이어서 볕이 바르게 든다.
- 【오리골】 송전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오미기】 송전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주봉재】 송전 마을 뒤 용문 노사와 경계를 이루는 재
- 【울뜰】 오미기 남쪽에 있는 들
자랑거리
【송전교회】
예천송전교회는 1908년경 문경 노목교회에서 신앙을 받아들인 김정길 씨가 가족들과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 회중교회로 성장했으며, 1936년 죽안교회에서 송전교회로 개명해 지금까지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척 110주년이 넘는 교회로 유천면 관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교회로서 지역사회에서도 꾸준한 기부와 봉사 그리고 소외된 이웃을 위한 일에도 늘 앞장서며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신앙 공동체이다.
또한 2017년부터 관내 어르신 100여명을 대상으로 활기하고 건강넘치는 노후를 보내실 수 있도록 『화남실버대학』을 개설하여 운영하는 등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교회이다.
| 송전교회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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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설화
조선 영조때 명당골에 절이 있었는데 하루는 지주가 시주를 갔다가 돌아와 보니 절 가운데 있는 기둥의 색이 이상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수많은 빈대가 기둥에 붙어 있어 이에 겁을 먹은 지주는 할 수없이 절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중평리(中坪里)』 이야기
지명유래
- 본래 예천군 지서아면 지역으로 18세기 초 파평 윤씨가 개척하였으며 꽃재 남쪽 넓고 확 트인 들판이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고 중들, 즉 중평이라고 한다.
자연마을
- 【중평(中坪) / 중들 】 넓고 확 트인 들판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평이라고 하며 꽃재 남쪽이어서 화남이라고도 한다.
- 【은행정(銀杏亭) / 으능지이】 옛날 중평마을 북쪽에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꽃재를 넘나들던 길손들이 이 곳에서 쉬어가던 곳이다. 원래의 은행나무는 고사하고 그 뿌리에서 새로 나온 은행나무가 서 있다.
- 【송아짓골】 주왕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죽은 송아지를 묻었다고 한다.
- 【신조골】 중평 뒤쪽에 있는 골짜기
- 【새골】 중평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
자랑거리
【우렁이양식장】
중평리 68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매년 우렁이 부화와 양식을 통하여 모내기와 함께 유천면 관내 우렁이농법을 활용하는 농가에 널리 보급하여 품질좋은 친환경 우렁이쌀 생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한 예천군 관내는 물론 인근 안동, 상주 등 45개 영농작목반에 보급하는 등 유천지역이 친환경농업 중심지라는 자부심을 갖게하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구 화남초등학교】
중평리 18번지에 위치한 구)공립 초등학교로 인근지역 중평, 송전, 사곡, 화전, 마천, 죽안, 수심, 손기, 고림 그리고 한때는 용문면 노사리까지 학구로 하였으며 2007년 통폐합까지 국사봉 아래에 배움터를 마련하고 68년간 유천면 북부지역 학령아동에게 세상을 살아갈 지식과 지혜의 싹을 심어 주었다.
1939.7. 1. 유천공립심상소학교 부설 중평간이학교로 개교 하였으며 1944년 3월 20일 유천북부공립국민학교로 승격되었으며, 1950.6.1.유천북부국민학교로 교명변경, 1955.5.19. 화남국민학교로 교명 변경, 1996. 3. 1. 화남초등학교로 교명 변경 2007. 3. 1. 유천초등학교로 통폐합하였다. 예천교육지원청의 페교 매각계획에 따라 2015. 12. 7. 개인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죽안리(竹岸里)』 이야기
지명유래
- 예천군 지서아면 지역으로 임진왜란 후 청송(청시이)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후 18세기 중엽에 경주 최씨가 청송에서 이웃한 이 곳 대나무숲을 헤치고 개척하고 이랑이 긴 밭을 이루고 장평(쟁피이)라고 하였다.
- 마을 뒤 비봉산 봉황은 대나무 열매를 먹어야 하기에 봉황과 짝을 맞추어 이 마을에 대나무를 많이 심은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어 죽안이라고 한다.
자연마을
- 【장평(長坪 )/ 쟁피이】 꽃재를 넘어서면 좁은 계곡만 계속 되다가 이 마을 앞에서 이랑이 긴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이 곳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장평이라 한 것이 변음되어 쟁피이라 불린다고 하며 지금은 1967년에 농업용으로 축조된 죽안저수지에 많이 편입되었다.
옛날 무더운 여름철 장평 들판에서 거리가 오리나 되는 사래가 긴 밭을 갈던 농우가 한 이랑도 채 갈지 못하고 폭염에 쓰러질 정도로 길 들판이 있었다고 한다. - 【청송(靑松) /청시이 】 임진왜란을 피하여 온 사람들이 처음 개척하였으며 마을 뒤 비봉산 양지편에 있는 마을이며 마을 주위에는 소나무가 많이 우거져 왜병들이 송자가 든 마을을 두려워 나머지 침범하지 못했던 곳이라고 한다.
옛날 용궁장을 보러 가려면 죽안,화전,마천,사곡 주민들은 청시골을 넘어 흑송을 거쳐 가곤 하였다. - 【원객골(遠客) / 원대이골/언딧골】 장평 마을 서편에 있는 원댁골은 옛날 이곳에 옛날 이곳에 주막이 있었는데 꽃재를 넘나덜던 길손들이 숙소로 이용하였으며 먼 곳에서 오신손님들이 머물던 곳이라 하여 원객(遠客)골이라 하였으며 이 원객골이 시간이 지나면서 음으 변하여 원댁골(원대이골)이라 불려지고 있다.
- 【뒷골】 새터 뒤에 있는 골짜기
- 【새터】 장평(쟁피이) 남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
자랑거리
【유천국사골마을다목적체험관】
유천국사골마을은 병풍처럼 둘러싼 백두대간 국사봉 아래 유천면 죽안길 136에 위치해 있으며 농림축산부의 일반농산어촌개발 권역단위종합개발사업으로 2013년부터 2016년 까지 4년간 총사업비 43억원을 투입하여 다목적센터, 광장, 6개 주변마을 정비 등을 실시하여 농촌체험휴양마을로 운영 중에 있다. 다목적센터서는 고추장·된장만들기, 메뚜기잡기 등 사계절 다양한 농산촌체험이 가능한 곳으로 사계절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죽안저수지를 앞에 두고 있어 그야말로 연중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천의 대표적 명소이다. 각종 동호인 활동과 동창회는 물론 가족단위 소모임도 진행되고 있으며 매년 봄 가을이면 농촌에서 살아보기 체험객들이 이 곳에 머물며 귀농전 농촌생활을 체험해 보는 곳으로 그 중 일부는 예천에 정착하여 꿈에 그리던 농촌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죽안저수지】
죽안저수지는 1967년 농업용으로 축조되었으며 한국농어촌공사 예천지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제방길이 282m, 제방높이 17.7m이다.
만수 면적 약 18만 5,124㎡의 중대형 분지형 저수지이며 수심은 3~4m로 깊은 편이다. 주변이 산과 숲으로 둘러싸여 경관이 뛰어나며 조용하고 한적하여 찾은 이들이 많다.
인근에 『유천국사골마을 다목적체험관』이 있어 각종 동호인들과 다양한 농산촌체험을 위한 이용객의 발길도 잦다.
| 죽안지 여름 | 죽안지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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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정】
유천면 죽안리 1-3번지에 위치하며 광복 후 무술년(1958)에 최일(崔一)씨가 수십명의 동지들을 모아 낙서계(낙서회원45명)를 조직하고 국사봉 아래 유천(柳川)가에 낙서정(洛書亭)을 세우고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1978년 폭우로 무너진 정자를 1980년 최일의 종손(從孫) 최도연씨가 상호친목의 터전으로 삼고자 유천면내의 유지들과 규합하여 옛터에다 다시 세우고 낙서정(洛西亭)으로 개칭하였다. 1996년에 낙서회원이 정자 동편에 송덕비를 건립하였으며 낙서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천리(麻川里)』 이야기
지명유래
- 국사봉 남쪽 아래 있는 마을이므로 뫼 아래의 마을이라는 뜻이 음이 변하여 마래가 되었다고 하며 또는 마을 뒷골에서 여러 갈래의 내가 흐르는 것이 마치 삼단(麻束)같다고 하여 마천(麻川)이라 불린다고 한다.
자연마을
- 【마천(麻川 )/뫼아래, 마래】 마을 뒤의 높은 산 국사봉 아래 마을이므로 뫼 아래가 변음되어 마아래, 마래라고 불리어지며 일설에는 18세기 전반기에 남원 양씨와 청송인 심사도가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麻)가 많고 마을 중앙에 내(川)가 흘러 마래, 마천이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 【성재, 삿갓재 】 마을 뒤편에 임진란때 성터였던 성재와 삿갓모양의 삿갓재, 띠풀이 많이 자라는 띠 밭둑을 삼재라고 하며 이 삼재가 온갖 잡귀를 막아주어 이 마을 주민들은 평안히 지낼수 있다고 전해진다.
- 【곡골】 마천에서 중평으로 내려가는 좌측에 있는 골짜기로 진한 황토색의 토질로 유명하다. 이 곳 주민들은 ‘곡골들 쌀을 먹으면 죽은 사람도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토질이 좋아 미질이 우수한 쌀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 【마당재】 마아래 서쪽에 있는 고개
- 【마릇골】 마아래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새마】 마아래 서쪽 옆에 새로 된 마을
- 【선돌골】 마아래 복동쪽에 있는 골짜기, 선돌이 있다.
- 【언디골】 마아래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일무새】 마아래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조막골】 마아래 북쪽에 있는 골짜기
자랑거리
【마천지(麻川池)】
마천리 57번지 위치하며 1981년 축조된 인근 지역 농업용수 공급이 목적이다.
국사지맥 아래 위치하며 저수지 제방에 서면 곡골들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화전리(花田里)』 이야기
지명유래
- 임진왜란 이후 영월인 엄천손이 가족을 데리고 피란을 와 비봉산에서 바라보니 마을이 온통 꽃으로 덮여 있어 가히 사람이 살 만한 터라고 생각하여 정착하였으며 목화도 잘 되어 화지터 또는 화전이라고 하였다.
- 마을 주변에는 꽃밭이마. 양님이, 양지끝, 공생이, 성두 등 마을 이름만큼 아름다운 지명을 가진 들판과 골짜기가 많다.
자연마을
- 【화전(花田) /화지터】 꽃재 아래 꽃들이 만발하고 목화가 잘 되어 화지터 화전이라 함
- 【동기】 화전리 291번지 일원으로 국사지맥이 지나는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하며 문경 산북 월천리와 경계를 이룬다. 1970년대까지는 농사를 지으며 3가구 정도가 살았으나 정부의 화전민 이주정책에 따라 모두 객지로 떠나고 현재는 석불좌상을 모신 부늘암에 스님 한 분만 정진 중이다. 2023년도 동기까지 가는 임도가 포장되어 접근성이 좋아졌다.
- 【부느리 /불유(佛遊)】 화전 서쪽 비봉산 자락에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었다고 하며 부처가 노니는 곳이라 하여 ‘불유(佛遊)’라 하였으며 시간이 지나 음이 변하여 그 일대를 부느리라고 한다.
- 【꽃밭이마】 화전 마을입구 야트막한 산자락에 위치한 지역
- 【비봉산】 모양이 봉황이 나는 형국이라고 하며 고려시대 불유사가 있었던 지역
- 【양지끝】 화전 서쪽 부느리 가는 길 양지쪽에 있는 들
- 【양님이】 수지미산 뒤편 부느리쪽을 바라보는 산 비탈에 위치한 들
- 【서들】 동기가는 오른편에 위치하며 태초 화산활동이나 빙하활동으로 생겨난 돌무더기가 넓게 형성된 너덜겅 지역으로 이 마을에서는 서들이라고 한다.
- 【정지바】 동기가는 길 서들아래 위치한 산자락
- 【원대이골】 화전 마을 뒤쪽 골짜기
- 【성두】 화전 서쪽 사곡천 주위 들판
자랑거리
【부느리석불좌상】
유천면 화전리 292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학계에 의하면 고려 중엽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본체높이 74cm, 머리높이 28.5cm, 어깨 너비 37cm, 가슴 너비 24cm의 이 불상은 너비 77cm의 광배를 갖추고 있는데 석불과 함께 하나의 돌로 만들어 졌다. 얼굴에는 많은 상흔이 있는데 특히 코를 만지면 자식을 본다는 이야기가 있어 코 부분에 많은 보수를 하였다. 법의는 우견편단이고 결가부좌한 무릎은 넓고 크며 광배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다른 부분도 비교적 간결하다. 각 부분이 무겁게 보이고 규격도 줄어든 것으로 보아 단국대학교박물관 정영호박사는 고려중엽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주변 일대의 경작지에서 이따금 고려시대의 도자기와 기와조각이 나와 사찰터로 추정되는 비봉산 자락에 있었던 것을 1950년경 이동구씨(1905년생)가 현위치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사월 초파일에는 산아래 화전을 비롯하여 여러 마을 주민들이 찾아 예불을 올리며 현재도 스님 한 분이 거주하며 수행 중이다.
『사곡리(沙谷里)』 이야기
지명유래
- 동쪽 절골에는 사찰이 있었으며 함녕김씨가 기묘사화(1519)를 피하여 정착하고 사골 또는 돌개라고 하였으며 돌이 많고 재가 높아서 돌골이라고도 불렀다.
이후 경주 최씨가 임진란(1592)를 피하여 들어오고 사곡(寺谷)이라고 부르다가 억불정책의 영향을 받아 사곡(沙谷)으로 변경되었다.
자연마을
- 【돌개 /돌골/ 사골 /사곡】 마을에 돌이 많고 재가 높아 돌개라고 불리어 지다가 동쪽에 있었던 사찰에서 유래되어 사골(寺谷)으로 부르다가 억불정책의 영향으로 사곡(沙谷)으로 변하였다.
- 【동막들】 사곡 서쪽에 있는 들
- 【공생이골】 사곡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 【쯧재골】 사곡 서남쪽 동막들 옆에 있는 골짜기
- 【동밑둥】 사곡 동남쪽에 있는 들. 등성이 밑이며 사곡 동네 밑이다.
- 【동산들】 사곡 남쪽에 있는 들, 동산 밑이다.
- 【매바짓들】 사곡 서남쪽 머구재 아래 있는 들판
- 【송골】 사곡 북쪽에 있는 골짜기
- 【히굿들】 사곡 서쪽에 있는 들
- 【대웃골】 팔등 동쪽에 있는 골짜기
- 【갓골】 대웃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머구재】 사곡과 문경 산북을 잇는 고개
- 【팔등】 사곡 서쪽 국사지맥 구간 정침봉을 품은 여덟 등성이
자랑거리
【국사봉】
예천군 유천면 사곡리와 용문면 두천리, 문경시 동로면 인곡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727m)으로 국가에서 봉화대를 세웠던 곳이라 하여 국사봉이라 불렀다고 하며 예천군의 명산이며 유천면의 진산이다. 가뭄이 심한 해에는 1982년까지 기우제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다.
2023년에는 국사봉~공수골재~꽃재~팔등~머구재를 잇는 국사지맥 등산로가 정비되었으며 백두대간 및 지맥을 타는 등산 애호가들의 발길도 잦은 지역이다.
| 국사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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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재】
국사지맥이 흐르는 해발 500m 지점에 문경 동로면 마광리와 예천 유천면 사곡리를 잇는 고개이다. 꽃재는 봄이면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이름도 아름다운 꽃재라고 하며 갑오동학농민혁명(1894) 당시 동학농민군이 옹기를 지고 넘나들던 애한이 담긴 고개로도 유명하다. 또한 꽃재를 넘어 문경과 예천간 자연스레 혼맥이 형성되었으며 주민들은 동로 벌재장과 손기장을 보러 다녔다.
【진주강씨 효열각】
사곡마을 입구 101번지에 위치하며 1962년에 건립되었다.
최근주의 처 진주강씨(1872~1958)는 치화의 딸로 17세에 최근주와 혼인하였다. 시무보를 섬기고 남편을 봉양함을 공경으로 행하고 동서들과도 화목하여 집안이 평화로웠다.남편이 우연히 병이 들어 의원의 말에 따라 눈 위의 뱀을 복용하면 나을 수 있다고 하여 산과 들을 헤매던 중 까마귀와 까치가 어지럽게 우는 소리에 그 곳으로 가보니 뱀이 있어 잡아다가 복용케하여 병이 나았다. 몇 달을 살다가 더 위중하여 명을 다하니 유인의 당시 나니 20세였다. 3년동안 시묘하며 흐느껴 울어도 소리를 내지 않았고 슬퍼도 얼굴에 나타내지 아니하고 오직 시부모 마음이 상할까 두려워했다. 길쌈을 집안의 생계로 삼아 시부모 봉양을 줄이지 아니했다. 여름날 시아버지 우환이 더해져 갈증이 심해지자얼음을 그리워 했다. 얼음을 구하지 못해 애태우던 중 홀연히 범이 나타나서 범을 따라가 얼음을 얻어다 드려서 바로 갈증을 낫게 했다. 이처럼 사람의 며느리된 도리를 다하였다. 자식을 낳지 못하여 조카 영악을 양자로 들였으며 고향 인사들과 최씨 종중에서 기탁금을 모아 위토를 마련하고 1962년에 비와 비각을 세웠다.
설화/전설
【국시에 얽힌 전설】
사곡(沙谷里) 뒷산 국사봉(國師峯) 마루턱 소나무에 “국시(國始)태”라는 열매가 달렸는데 이상하게도 이 열매는 사람의 물음에 말 대답을 하여 인간소원을 풀어주어 동네에서는 영신(靈神)으로 믿어 사당을 짓고 국시(國始)로 모셨다 한다.
매년 정월(正月) 초(初) 닷세 날, 동네에서 가장 정결한 가정을 택하여 모셔놓고 국시(國始) 형체(形體)에다 오색(五色) 현란한 종이와 새털 등으로 장식시켜 국시에게 소리로 문답을 하였다. ‘국시 서낭님! 새해에는 풍년(豊年)이 들겠습니까?’ 라고 물을 때 풍년이 들면, “윙-달달-” 하는 소리가 나고, 풍년이 들지 않으면 아무리 절을 하고 묻고 달래도 소리를 내지 아니 하였다 하여 동네에서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묻기도 하고 개개인의 가정에 길운(吉運) 등을 모두 묻는 토정선생(土亭先生) 역할을 하였다 한다. 이렇게 동네 주민들이 극진히 모시고 믿는 가운데, 언제인가 마을의 「최동락」이란 사람이 아들이 없어 국시서낭께 백일기도(百日祈禱)하여 아들을 얻어 이 기쁜 마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새로이 서낭집을 짓고 국시를 집안으로 모셨는데 비운(悲運)이 들어 아들이 죽게 되자 믿어도 소용이 없다 하여 국시를 천대(賤待)하자 국시(國始)는 윙하고 슬피 울며 충청도 월악산(月岳山)으로 날아갔다고 전해오고 있다.
지금은 국시사당(國始祠堂)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고, 그 터가 어디인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국사봉 무제(기우제)】
국사봉 산 중턱에 사시사철 마르지않는 샘이 있어 비가 내리지 않을 때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가장 최근자료는 1982년 7월 7일 (음 5월 17일)에 국사봉 정상에서 지낸 것으로 면장이 초헌관, 단위조합장이 아헌관, 참여자 중 가장 연장자가 종헌관을 하였으며 축관은 사곡리의 최혁기씨가 맡았었다. 기우제는 날이 아무리 가물어도 7월에 지낸다고 하며 그래서 7월은 천간(天干)으로 따지면 경(庚)에 해당하므로 무제를 달리 경제(庚祭)라고도 한다.
【참혹골】
국사봉 아래 동쪽 골짜기 지역으로 조선시대 어느 해 인가 큰 물난리가 있어 사곡 동쪽 영월 엄씨들이 살던 오리동쪽에 큰 수해로 많은 사람들을 잃은 참혹한 대참변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참혹골이라고 한다. 이 곳 영월엄씨 주민들은 풍수설에 따라 고향을 버리고 멀리 떠나 있다가 250여년전 지금의 화전리로 다시 돌아와 터를 잡았다고 한다.
2023년 7월 예천지역이 큰 수해를 입을 당시에도 국사봉 자락에서 흘러내린 물이 넘쳐 농로가 유실되고 주변 논밭이 침수되는 등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며 이상기후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고림리(高林里)』 이야기
지명유래
- 신라때부터 조선 초까지 고림부곡이 있었으며 당동현청이 바깥고림에 있었다 수원백씨가 마을을 개척할 당시 나무가 높이 우거져 고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자연마을
- 【안고림 / 내고림 / 안마】 고림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안고림이라고 한다.
- 【바깥고림/ 외고림/바깥마】 안고림 남쪽에 있는 마을로 고림의 바깥쪽에 있다고 하여 바깥고림이라고 한다.
- 【피앞들】 안고림 남쪽에 위치한 들판으로 산북면 흑송리로 넘어가는 고개의 산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장수가 태어날 조짐이 있다하여 임진왜란 당시 청나라 이여송이 혈을 자를 때 피가 앞들까지 흘러 내렸다 하여 피앞들이라고 한다.
- 【산골재】 한약재 산골이 많이 나던 골짜기로 손기하고 경계지역.
- 【말골】 흑송과 경계지역에 있는 골짜기
- 【한골】 작골과 잿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
- 【새터】 안고림 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
- 【승까세】 안고림 동쪽에 있는 산
- 【이내비】 피앗들 옆에 있는 골짜기
- 【저건너】 피앗들 남쪽 건너에 있는 골짜기
- 【한잣골】 안고림 북쪽에 있는 골짜기, 큰 재 밑이 된다.
전설/설화
【삼신할미당】
안고림 뒷산에 위치하며 1795년 경에 셋 할머니 탱화(幀畵)를 모시기 위해 삼신당(三神堂)을 지었으나, 약 150년 전 화재(火災)로 인해 소실되어 1938년에 새로이 개축(改築)하였다고 한다.
국사봉 숫(雄)서낭과 삼신당의 암(雌)서낭 사이를 방울이 내왕(來往)하면서 찾아와 기도하는 이들의 소원(所願)을 들어 주었으며, 특히 삼신(三神)께 점지(點指) 받아 자식 갖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곳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서 지나 가지를 못하고 혼례(婚禮)길 가마채도 가마에서 내려 팽나무고개를 걸어서 지나가야 되었다고 하며, 또한 동네의 번영과 안녕(安寧)을 지켜준다는 믿음이 강하여 군(軍) 입대(入隊)하러 가는 동네 청년들도 이 곳에 찾아와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게 해달라는 인사를 하고 떠나며 제대(除隊)를 하고 온 후에도 삼신(三神)님의 음덕(陰德)으로 무사히 다녀옴을 인사드린다고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객지(客地)에서 생활(生活)하는 고향(故鄕) 사람들도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고향이 그리울 때는 삼신당을 향해 재배(再拜)한다. 삼신당이 있는 이 곳을 팽나무고개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삼신당(三神堂) 밑에 팽나무가 서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 삼신할미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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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림리 느티나무】
고림리 249번지에 위치한 느티나무로 수령은 260년정도로 추정되며 나무둘레(흉고)가 610cm에 이르며 군 관내에서 가장 굵은 나무로 알려져 있다.
| 고림리 느티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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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
고림리는 역사가 오래된 마을로 고려시대 도선국사(827-898)가 절을 세우려고 창주도선(創柱道詵)이라는 돌기둥을 세웠다가 절의 창건을 그만두고 떠나면서 “70년후 30리 밖에서 한 의인이 죽으면 이 곳에 묻어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수원백씨 중시조묘】
고림리는 신라시대 수원백씨가 처음 개척하였다고 하며 2012년경 신라 경명왕 당시 중랑장을 지낸 수원백씨 중시조 백창직의 묘가 고림리에서 발견되었다. 백장군은 신라54대 경명왕의 사위로 무인이었다. 이 마을에서 전설처럼 구전으로 전해오던 백장군의 묘가 수원백씨 중앙종회에 중시조 묘임을 사료와 고증을 거쳐 확인된 것이다. 1100여년이 넘게 구전을 통해 내려오다가 수원백씨 후손들에 의해 실제 확인된 것이다. 진실을 안은 구전의 힘이 놀랍다.
『송지리(松芝里)』 이야기
지명유래
- 1600년경 전주이씨가 처음 정착한 마을로 그 뒤 부천 허씨가 들어와 마을 앞 싸리재에 정자를 지어 놓고 천석의 부를 누리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우리도 부자가 되어 정자를 지어야 겠다는 염원을 담아 정자를 바란다는 뜻으로 망정이라고 불렀다 한다.
- 또한 임란 후 지금의 마을 입구에 정자를 지어놓고 풍류를 즐겼으나 200여년전 정자가 소실되자 재건을 염려하던 것이 유래가 되어 망정이라고도 한다.
- 솔안은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1680년경 안동 권씨가 개척하였으며 마을 주변에 소나무 숲이 많아서 송내라 하다가 뒤에 솔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1914년 망정,송내(솔안),지곡,율현, 문경 흑송 일부를 병합하여 송지라 하였다.
자연마을
- 【솔안 /송내(松內)】 주변에 소나무가 울창하여 솔안이라고 하며 안동권씨 집성촌
- 【망지 /망정(望亭)】 송지에서 가장 큰 마을로 공군16전비 활주로 인접한 마을
- 【새골 / 샛골】 솔안과 망정 사이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골, 샛골이라 부르며 마을 한 가운데 한 길 남직한 입석이 있는데 이를 골매기라고 하며 해마다 정월보름 자정에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 【언골】 망지 앞에 있는 골짜기
- 【참샛골】 언골 옆에 있는 골짜기, 찬샘이 있다.
- 【넉바우】 넉바우가 있는 들
- 【고랑들】 솔안 앞에 있는 들
『율현리(栗峴里)』 이야기
지명유래
- 본래 예천군 당동면 지역으로 장흥임씨 후손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 주위에 밤나무 숲이 많아 밤고개(栗峴)이라고 하였으며 1914년 망정 일부, 손동 일부, 조동 등을 병합하여 율현동이라 하였다.
자연마을
- 【밤고개 / 큰마(栗峴)】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 둘레 언덕에 밤나무 숲이 우거져 밤고개라고 하였으며 12밤고개라 할 만큼 작은 마을이 많은데 그 중 가장 오래되고 큰 마을
- 【동산(東山)/동산(洞山) /동새】 밤고개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장흥 임씨 조상의 묘가 있는 동쪽에 이 마을이 있기 때문에 동산이라 불리어지며 또 한편 마을 가운데 산이 있어 동산이라고도 한다.
- 【조동(曺洞) / 교동(校洞)】 고려말에 조씨가 마을을 개척하여 재산이 천석에 이르렀는데 조씨가 살던 마을이라는 뜻으로 조동이라 불렀다고 하며 조씨들이 풍수설에 의하여 마을 앞이 허하면 재산이 없어진다하여 마을 앞에 흙으로 둑을 쌓았는데 지금도 성과 같은 둑이 길게 남아 있다.
또 향교가 있었으므로 교동(校洞)이라고 불리어졌다고도 한다. - 【신전(薪田) / 섶밭】 교동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땔나무숲인 연료림을 섶밭이라고 했으며 이 마을은 옛날 근처 마을의 연료림 자리에 생긴 마을.
- 【갓속】 동산내의 한 마을로 갓처럼 생김 마을
- 【범골】 지형이 범같이 생긴 골
- 【개산고개】 밤고개내의 한 마을이다.
자랑거리
【물체당(勿替堂)】
율현리 143번지에 위치하여 1984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현 소유자인 임재원의 8대조인 임노운(조선21대 영조시기)이 매입한 건물로 그의 호를 따서 ‘물체당’이라고 한다.
유천면의 대표적인 국가문화유산으로 종마루가 멋스러운 물체당은 경북선 철로 맞은편 우거진 송림을 배경으로 높은 축대 위에 위치한 고택이다.
예스럽고 소박한 평면구조와 폐쇄적인 안채 대청의 구조는 우리나라 주거사 연구학계에서 중요자료로 평가 받는다.
| 물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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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송정(三松亭)】
율현리 산20번지, 율현에서 송지로 넘어가는 산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정면3칸 측면1칸반 규모의 목조와가 팔작지붕 정자이다. 세종때 무과에 급제하여 홍산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공을 기리는 비석까지 세웠으나 단종이 폐위되자 이 곳 율현리로 낙향하여 우거한 장흥인 삼성 임귀지(林貴枝, 1435-1508)공이 건립하여 학문을 하며 한가히 보내던 곳인데 세월이 흘러 훼손되자 후손들이 1927년에 재건하였다.
『연천리(蓮泉里)』 이야기
지명유래
- 18세기 후반에 개성고씨가 개척하여 마을 앞 연못에 연꽃이 보인다 하여 연화동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못이 헌종11년(1845) 매몰된 이후 못안(모산)이라 불렀다. 연화동과 마을 북쪽에 물이 차고 큰 샘이 있어 찬샘(寒泉)을 합쳐 연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마을
- 【연화(蓮花)/모산(池內)】 못안(池內) 모산, 마을 아래 못이 있어 못 안의 동네라 하여 못안(池內), 모산으로 불렀다. 그리고 이 마을 북쪽에 있던 샘이 크고 물이 찬 도두물(道井) 또는 찬샘마을(寒泉), 불당이 있었던 당골(堂洞)마을은 지금 공군비행장 부지에 편입되었다.
- 【웃갈마/새마】 모산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당초의 웃갈마는 지금 비행장 부지에 편입되고 인근에 새로 마을이 형성되어 새마라고 한다. 이 마을은 소백산 줄기에 있는 칡넝쿨이 이 마을까지 뻗어와서 갈마(葛麻)를 생산하였던 지역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기도 하다.
- 【공군충효마을】 공군제16전투비행단 정문앞에 위치해 있으며 공군부대에 근무하는 군인가족들의 영외 주거지역으로 101동에서 109동까지 9개동이 있다. 2012년 준공후 입주가 시작되었으며 교육시설로는 예천군립 유천어린이집이 있다.
- 【연화(蓮花)/ 못안,(池內) 모산 】 마을 앞 못에 연꽃이 있어 연화, 못안의 동네라 모산
- 【도무물 /도정(道井)】 모산 북쪽에 있는 마을
- 【갈마】 모산 서쪽에 있는 마을, 앞에 찬샘이 있으며 갈마음수형의 명당이 있었다고 한다.
- 【달봉/월봉(月峯)】 갈마 옆에 있는 산
- 【당골】 도두물 북쪽에 있는 마을, 불당이 있었다.
- 【돌고개】 도두물 뒤에 있는 고개, 돌이 많이 있다.
- 【매봉산/鷹峯】 갈마 앞에 있는 산 매처럼 생겼다.
- 【복상골】 모산 앞에 있는 골짜기
- 【오산골】 찬샘골 옆에 있는 골짜기
- 【웃갈마】 갈마음수형의 명당, 국사봉의 칡넝쿨리 이곳까지 뻗어와 갈마을 생산하던 곳
- 【히네페】 갈마 뒤에 있는 골짜기
『용암리(龍巖里)』 이야기
지명유래
- 19세기 전반에 영월 엄씨가 용암을 개척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장흠 임씨가 종매를 개척하였으며 마을 앞의 산이 용의 형국이라 용암이라 하였고 어룡산에 있는 용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자연마을
- 【용바우 / 용암(龍巖)】 마을 앞산 창달밖골 주령이 용의 형상이고 마을 앞 논에 있는 바위가 개구리 형인데 용이 개구리를 잡으러 가는 형이라 하여 용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어룡산에 있는 용암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마을 입구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용바우, 용암(龍巖)이라고 부름
- 【종뫼 (鐘山) / 종미(終尾)】 1800년경 장흥임씨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하는데 마을 뒷산 이름이 매가 날아가는 형상이라 응봉산인데 이 산의 꼬리 부분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종미라 부른다고 한다.
- 【웃어룡, 웃어리이 / 어룡(魚龍), 】 마을 뒷산에 물고기 모양과 용모양으로 된 바위가 있어서 산을 어룡산이라 하고 마을을 어룡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랫어룡은 개포면 가곡리 소속인데 못둑이 경계이다.
- 【막강개 / 막강골】 절골 옆에 있는 골짜기
전설/설화
【어룡산 전설】
어룡 마을 앞 어룡산 중허리에 어룡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는 이 마을에서 태어난 장수가 앉았던 자국과 신끈을 맬 때 디디고 섰던 자국이 있다 하며, 이 장수는 용바위에서 용마을 타고 다녔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이산에는 병풍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풍산 류씨와 선성 김씨가 다투다가 나중에는 이 바위를 깨트려 버렸다고 하며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 산에 비룡천상형의 명당이 있는데 이 두 성씨가 서로 묘를 이 명당 자리에 썼다고 자랑한다고 한다.
『초적리(草笛里)』 이야기
지명유래
- 개포면의 파리골 우두원과 머글바 사이에 넓은 풀밭이 있었는데 그 풀밭 위에서 신선들이 피리를 불고 놀았고 그 피리 소리가 이곳 마을까지 들려왔던 곳이라고 하며 푸적골 또는 초적(草笛)이라고 하였다.
- 새풀로 지붕을 한 작은 절이 있었다고 하여 푸절골이라고 불린다고도 한다.
자연마을
- 【푸적골/ 푸절골】 경주 최씨 세거지로 작은 절이 있어 푸절골이라 하다가 신선들이 피리를 불고 놀았다 하여 푸적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머글바우】 푸적골 앞산 너머에 있는 들
- 【북상골】 푸적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우대골】 푸적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자랑거리
【최덕수 효자각/최원기처 함양노씨 효열각】
유천면 초적리 산26번지에 위치하며 최덕수와 함양노씨의 효열을 기려 건립되었다. 효자 최덕수는 중병에 걸린 아버지의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짐작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선혈을 드려 완치케 한 효성이 지극한 효자로 조정에서 동몽교관의 벼슬을 내리고 여각을 세우게 했다.
효열부 함평 노씨는 효자 최덕수의 종현손부이고 최원기의 처로서 일평생 부군의 묘전에 가서 곡하며 추모하였고 평생을 소복과 소식으로 보냈다.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혼자된 후 아녀자의 도리를 다한 노씨는 유림과 군 당국 추천으로 정려되었다.
【푸적골지/초적지】
초적지(푸적골지)는 1945년 축조되었으며 수혜면적은 4.4ha에 달하고 저수량은 10.5천톤, 제당연장은 100M, 제당고는 5M로 수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초적리 일대 농업용수 공급에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근래 저수지 확장계획도 있다.
최근 초적지는 매년 여름이면 청초한 연꽃이 저수지를 뒤덮을 만큼 풍성하고 아름답게 피어나 길손들의 발길이 머무르며 주변을 정비하여 아름다운 연꽃 경관지로 조성해 나갈 계획이다.
| 초적지 연꽃 개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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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설화
【선돌 (골매기장군석)】
마을입구에는 부족국가시대(部族國家時代) 마을의 경계(境界)로 세운 선돌이 있다.초적리(草笛里) 마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잡귀(雜鬼)를 추방하기 위해 마을 입구(入口)에 서 있는 7척(尺) 정도의 이 자연석을 마을의 수호신(守護神) 으로 모셔 놓고 동신제(洞神祭)를 지내고 있다. 이 마을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형(臥牛形)”이므로 이 돌이 골단(束草)에 해당되기도 하고, 소를 매는 말뚝이라고도 한다.
해마다 음력 정월이면 동네 주민들 중 부정(不淨)없는 세 사람을 선출하여 보름날까지 3일 간 몸가짐을 정결(貞潔)하게 하고 당일 목욕재계(沐浴齋戒) 하여 산신(山神), 목신(木神), 석신(石神)에게 마을 대표자 자격(資格)으로 마을의 번영(繁榮)과 안녕(安寧)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매산리(梅山里)』 이야기
지명유래
- 17세기 후반 남양인 퇴곡 홍씨가 영월부사로 있다가 이곳에 와서 퇴치라하였고 18세기 초에는 반남인 박선원이 화장에서 이곳에 와서 매산이라 하였다.
- 마을 뒷산 매화봉 아래 마을이라 하여 매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자연마을
- 【매산】 풍수설에 매화낙지형이라고 하는 매화봉 아래의 마을
- 【퇴치(退治) / 토치(土治)】 1670년경 참판공 홍퇴곡이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살면서부터 마을이 생겼고 선정하던 목민관이 정치에서 물러나 살던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어 퇴치(退治 )라 부르게 되었으며 한편 지형이 토끼처럼 생겼다고 하여 토치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 【새날터 / 새남터】 옛날 이곳에 새가 많아 소경이 돌을 던져도 맞아 ᄄᅠᆯ어질 정도였다고 하여 새날터, 조류동(鳥遊洞)이라고 부르며 새로 분가된 가족들이 형성한 마을이라고 새남터라고 한다.
- 【버드내】 퇴치 북쪽에 있는 마을, 마을앞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았다.
- 【건너마】 퇴치 건너쪽에 있는 마을
- 【게칠메기】 퇴치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 【거무시】 큰마 북쪽에 있는 들
- 【넘마】 퇴치 서남쪽 너머에 있는 마을
- 【머글바】 퇴치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오룡】 퇴치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장뚜골】 퇴치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
- 【넘마】 퇴치 서남쪽 너머에 있는 마을
자랑거리
【효자 박제정 정려문】
매산리 316-1에 위치하며 매괴당(梅槐堂) 박제정(朴齊政, 1827~1890)은 자는 화여(華汝)이며, 조선 순조,고종 때 효자이다
어릴 때부터 효행(孝行)이 지극하고 대장부로서 예의범절(禮儀凡節)에 어긋남이 없었으나 그의 나이 9세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6세 때 어머니께서 병환으로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을 때 주야(晝夜)로 시탕(侍湯)하고 대변(大便)을 맛보아 병의 차도를 알아보고 목욕재계(沐浴齋戒)하여 하늘에 빌어 자신이 대신 죽기를 원하였다. 병이 위독함에 단지(斷肢)하여 피를 어머니의 입으로 통하게 하여 생명을 구했으나 병세가 다시 악화되자 손가락 모두를 잘라 수혈케 하여 7년을 더 살도록 하셨다. 유림(儒林)과 군청(郡廳)에서는 그의 지극한 효행을 기특하게 여겨 자주 쌀과 고기를 주고 칭찬하므로 “내 무엇이 달라서 이런 일을 하는 가요, 이것이 나의 불효(不孝)를 더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고 간곡히 만류하였다.
후에 어머니가 천수(天壽)를 다함에 이십리 밖 묘소에 3년 간 매일 참배 (參拜)하여 통곡(痛哭)하며 그 슬픔을 다하였다.
그의 이러한 효(孝)를 행한 사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조정(朝廷)에서 알게 되어 당시 김건영 군수(郡守)가 어명(御命)에 의하여 1893년 정려문(旌閭門-홍문)을 세웠으며, 과거(科擧)에 급제하지 않았지만 사후(死後) 특별한 우대로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의 증직(贈職)이 내려졌다.
1977년과 1993년에 군비로 중수하였으며 2024년에는 예천군 비지정문화재보수사업의 일환으로 군비 사업비를 지원받아 중수하였다.
| 매산리 박제정 정려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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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정(農巖亭)】
가리 718-8에 위치하며 정면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목조와가 팔작지붕 정자이다.
호조정랑 밀성인 농암 박몽성(1623-1702)공의 유덕을 추모하여 그의 증손 박선발 공이 1777년 상퇴치동에 건립하였으나 1894년 동학혁명으로 소실되어 1964년에 중건을 하고 1975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재 이 정자를 중심으로 농암공의 후손들이 선조를 잘 받들고 친목을 돈독히 하고 있다.
【도암정(堵庵亭)】
매산리 194-1에 위치하며 정면5칸, 측면1칸 반 규모의 목조와가 팔작지붕 정자이다.
도암공은 일찍이 신학문에 종사하여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함에 따라 경상북도 운수과자을 시작으로 전매청 염삼국장과 대구전매청장을 지냈다.
도암 권영일(1909-1966)공의 유덕을 추모하여 공의 부인 김씨가 1970년에 거금을 들여 창건하였다. 도암공은 부모를 섬기고 선조를 받드는 일에 열성을 다였고 많은 친척 자제들을 이끄는 등 모범적인 삶을 사셨다. 도암공의 선친 태소공은 예천군수를 역임하였다.
【예천비행장】
1989년 민항기가 취항하여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경북 북부지역 주민들의 교통환경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으나 인근 중앙고속도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 개통에 따라 이용자수가 급감하며 2004년 폐쇄되었다. 이후 항공관련 산업과의 연계활용방안 등 다각도로 접근중이다.
『가리(佳里)』 이야기
지명유래
- 유천면 북단의 국사봉에서 산줄기가 이곳까지 뻗어 왔는데 마치 소가 누워있는 형상과 같고 소의 가리뼈에 해당되는 위치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가릿골이라 했으며 열두가릿골이라 하여 가리의 골골에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자연마을
- 【가릿골, 가리골,/가동(佳洞)】 연화봉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마을 앞들에 보리와 볏단을 쌓은 큰 더미가 많이 있는 곳이라 하여 큰 가릿골이라 불렀으며 이 마을 남쪽에 작은 가릿골의 들이 있다.
- 【가산】 마을 뒤에 큰 가산은 산세가 양쪽으로 교차한 것이 매우 아름답게 생겼으며 그 아름다운 산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가산(佳山 )이라 부르게 되었다.
- 【장터】 1931년 가동역이 생기고 기차가 통하면서 면사무소 등 기관이 들어서고 1950년대 시장이 섰으므로 장터마을이라고 부른다.
- 【새터마】 아릇마 너머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새터마라 부른다.
- 【아릇마】 가릿골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아릇마라고 한다.
- 【옛터, 이터】 가리곡의 옛마을이라 하여 옛터, 이터라고 한다.
- 【신작로/수실골】 국도변에 있는 마을이며 주위의 산에 참풀이 많이 나서 바람에 나부끼는 모양이 마치 수실과 같다고 하여 수실골이라 부르며 국도가 새로 개설되어 신작로마을이라 부른다.
- 【양지마】 산의 막힘이 없어 사철 양지바른 마을이라 하여 양지마라고 한다.
- 【음지마】 마을 뒤 연화봉이 가리어 마을에 일찍 산 그늘이 진다고 음지마라 한다.
- 【접시골】 장터마을 서쪽 군도변에 있는 마을로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지형이 나비 두 마리가 앉아 날개를 접는 모양이다.
- 【새마】 가릿골 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로 토치마을 일부가 비행장 부지로 편입되자 경작하던 밭에 1970년대 새로 집을 마련하여 취락을 형성한 마을이다.
자랑거리
【지윤락 효자비】
가리 331-2에 위치하며 1969년 비가 설치되었다. 효자 지윤락은 모친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손가락을 잘라 수혈을 하였으며 3년 시묘를 하며 잠시도 떠나지 않았으며 병시중들 때 옷을 평생 몸에 걸치고 어머니를 추모하다가 세상을 떠난 후 1969년에 세워진 비이다.
【초은처사 강신순 효행각】
가리 산 26-2번지에 위치하며 1969년 향리 사람과 주민 및 후손들이 행실을 선양하고자 효행각을 세우고 내현판은 동래인 정승모가 지었다.
가산 아래에 살았으며 호은 초은이고 선대는 진주인이다. 공은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를 받들어 뫼시면서 부드럽고 온순한 모습으로 순종하여 몸소 농사를 지어 봉양하였다 숙부에게 양자를 가서는 소생부모와 다름이 없었으며 숙부가 늙고 병들어 칩거하며 불편해하자 몸소 가마를 메고 들판을 두루 다니며 바람을 쐬고 풍경을 구경하고 감상하게 하여 그 답답함을 해소시켜 드렸다. 어버이가 기뻐하는 술친구를 청하여 술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등 십수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며 생가 부모와 양가 부모의 초상에는 가슴을 치고 울부짖으며 피눈물을 흘리며 기절하였다가 곧바로 깨어나서 예를 준수하고 상제를 지켜서 여막에서 3년을 떠나지 않은 등 지극한 효도를 다하였다고 한다.
【유인 경주최씨 열행각】
가동2길 89-8에 위치하며 목조단각으로 1963년에 건립되었다. 유인 최씨가 열행으로 소문이 나서 영남지역 여러 선비들이 이구동성으로 함께 칭송하였다. 17세에 지의수에게 시집을 왔는데 유인은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기고 공경으로 남편을 받들었다. 규문의 안에서는 화기애애하고 화목하게 했다. 일찍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녀들을 잘 기르고 가르쳐 시집 장가 보내고 문호를 일으켰으니 부덕이 갖추어 졌다고 하였다.
【한양이 의사 기념비】
1971년 4월 25일 유천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하며 석초 한양이(1883~1946) 의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한양이 의사는 용궁면 송암리 태생으로 1912년 결사대를 조직하고 친일배를 주륙하려다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루었고 출옥 후 해외독립군의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활약 중 또다시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겪었다. 의사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며 후세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한문교육에 기울였다.
1977년 광복절에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천면 율현리에 묘소가 있다.
【참고문헌】
- 예천대관 (1982년) - 예천문화원
- 내고장 유천 (1998년) - 재경유천면민회
- 예천군지 (2005년) - 예천군지편찬위원회
- 예천누정록 (2010년) - 예천군·예천문화원
- 예천지명유래 (2016년) - 예천군·예천문화원
- 예천의 효열 (2016년) - 예천군·예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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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25.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