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제목6월의 경상북도 독립운동가(창여 장진홍 애국지사)
작성자개포면 @ 2013.05.30 15:00:18

13. 6월의 경상북도 독립운동가

 

■ 공훈개요

 ◦성    명 : 창여(滄旅) 장진홍(張鎭弘) 선생, 칠곡

 ◦생몰년도 : 1895~1930

 ◦훈    격 : 건국훈장 독립장(1962년)

 ◦주요 공적

   ∙1914년 비밀 독립운동단체 광복단 가입

   ∙1919년 일제 만행(학살,고문,방화) 세계 각국 배부

   ∙1927년 경북경찰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폭파

   ∙1930년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 자결‧순국

 

 공적개요

  ◦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인명(仁明)학교에 입학하여 한말의 유학

자 장지필(張志必)의 가르침을 받고 졸업한 그는 1914년 3월 조선보병

대(朝鮮步兵隊)에 입대하여 1916년 제대후 곧바로 조국광복투쟁에 나

설 것을 결심, 당시 비밀 독립운동 단체였던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

였다.

 

  ◦ 1918년 7월, 광복단 동지인 이내성(李乃成)의 소개로 만주 봉천성

(滿洲奉天省)에서 김정묵(金正默)과 이국필(李國弼)을 만나 독립운동방

략에 관하여 논의하고 러시아 영토인 하바로프스크로 가서 교포 청년

80여명을 모집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 1919년 그가 귀국한 지 얼마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부친의 논

5두락(斗落)을 매각하여 자금을 준비하고는 서적행상(書籍行商)을 가

장하여 전국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일제에 의해 자행된 학살(虐殺)·방화

(放火)·고문(拷問)등을 자세히 조사하여 그 결과를 세밀하게 작성하였

다. 그리고 7월 미국군함이 인천항(仁川港)에 들어오는 것을 기회로 하

여, 그는 작성된 조사서를 군함 승무원인 경북출신(慶北出身)의 김상철

(金相哲)에게 부탁하여 미국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영문(英文)으로 번역

하여 세계 각국에 배부할 것을 의뢰하였다.

 

  ◦ 그후 부산(釜山)에서 조선일보지국(朝鮮日報支局)을 운영하기도 하

였으며 약장사를 하기도 하였던 그는 1926년 1월 이내성(李乃成)을 만

나 독립운동의 전개방법에 대해 협의를 하였으며, 1927년 4월경에는

이내성의 소개로 경북 경산군 경산시장(慶山市場)에서 국제공산당원으

로 자칭하는 굴절무삼랑(堀切茂三郞)을 만나 관공서(官公署)·은행(銀

行)·부호(富豪) 등에 폭탄을 투척하여 민심을 동요하고 자극시킴으로써

혁명을 촉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듣고 약 한달이 지난 뒤, 굴절이 만주

에서 몰래 들여온 다이나마이트의 뇌관과 도화선, 그리고 50원의 자금

을 받고 폭탄제조법을 주의깊게 배웠다.

 

  ◦ 그리하여 1927년 8월 그는 폭탄 2개를 시험용으로 제작하여, 칠곡

(漆谷)과 선산(善山) 경계에 위치한 봉화산(烽火山)에서 성능실험을 하

고, 이어 1927년 10월 16일 거사용 폭탄 4개와 자살용 폭탄 1개를 제

조하여 경북도청(慶北道廳)·경북경찰부(慶北警察部)·조선은행 대구지

점(朝鮮銀行大邱支店), 그리고 식산은행 대구지점(殖産銀行大邱支店)

을 폭파하려고 하였다. 그는 10월 18일 오전 9시경, 대구 덕흥여관(德

興旅 )에서 폭탄에 점화포장을 하여 여관 종업원이 박노선(朴魯宣)에

게 거사 목표지점 4개처에 송달을 부탁하였다. 같은날 오전 11시 50분

쯤, 폭탄이 폭발하여 은행원과 일제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은행 창문 70여 장이 완전히 부숴졌다. 일경은 폭탄을 운반

하였던 여관 종업원 박노선을 체포하여 취조하였으나 그의 신원을 알

아내지 못하였다. 한편, 여관 종업원이 폭탄상자를 들고 은행으로 향

하는 것을 확인한 그는 선산군 해평면(善山郡海平面)으로 피신하여 안

동(安東)과 영천(永川)에서 재차 거사를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

하고 말았다.

 

  ◦ 1928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대판(大阪)에서 안경점을 경영하고 있

던 동생 장의환(張義煥)을 마지막으로 만나고자 대판으로 가서 며칠을

머무르던 중 그를 검거하고자 본국에서 온 경북경찰부의 형사들에게

1929년 2월 13일 밤 습격을 당해 피체되었다. 본국으로 송환되어 취조

를 받은 그는 일제의 주구로 전락한 조선인 경관들에게 "조선 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

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

서할 수 없다"고 부르짖어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자신의 거사

는 단독으로 실행되었음을 주장하면서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그

는 반년만에 1심 재판을 받아 사형이 언도되자 그 자리에서 "조선독립

만세"를 고창하여 불굴의 독립의지를 과시하였다.

 

  ◦ 2심 재판에서도 역시 사형이 언도되었으며 고등법원(高等法院)에의

상고 역시 기각되고 사형이 확정되었다. 1930년 6월 5일, 그는 일제에

의해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목숨

을 끊는 것이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라고 생각하여, 그날밤 11시경

자결·순국하였다.

 

  ◦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

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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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1.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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