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제목자랑 1836:진유경 直提學(附 예천방문 362)
작성자장병창 @ 2009.02.09 06:27:47

  예천의 자랑(1836) : 상리면 명봉리 출신 진유경 직제학(附 예천방문 362)


---


  진유경(秦有經) : 이조 세종 때, 상리면 명봉리 출신, 자는 숙형(叔衡), 본관은 풍기, 행정 중길(杏亭中吉)의 후손, 장령 호(浩)의 아들, 세종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1444년(세종 26) 식년 문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하여 지평, 예조 참의, 직제학을 지냈다(朝鮮환輿勝覽 1929, 嶠南誌 卷8 豊基條 1937, 國朝榜目).


  [王朝實錄] : 1441년(세종 23) 11월 8일에 생원으로서 승정원에 고하기를, "동대문 밖 중량포(中良浦)에 물이 조금 따뜻하므로 이것이 온천이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하므로, 왕이 사람을 보내어 찾기를 명하였으나 결국 온천이 아니었다. 1450 년(문종 즉위년) 3월 5일에 성균 교서랑(成均館校書郞)으로서 겸성균사성 윤상(尹祥, 醴泉邑人)과 함께 불사(佛事)의 불가함을 상소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동년 8월 7일에 장령 하위지가 왕에게 아뢰기를, "성균관 교서랑 진유경을 한성부 참군 (漢城府參軍)으로 임명하였사온데, 그 관직 임명이 균평하지 못하였으니 개정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고, 그 이튿날 사헌부에서 또 아뢰었고, 동년 8월 15일에는 정언 홍일동(洪逸童)이 왕에게 아뢰기를, "진유경은 마땅히 중앙 관리의 6품으로 임명해야 할 것인데도 강등시켜 한성부 참군으로 임명하였으니, 적당하지 못하므로 개정하소서."라고 하였다. 1453년(단종 1) 2월 18일 지평 신자승(申自繩, 醴泉人)이 사헌부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진유경을 제천 현감으로 삼았는데, 진유경은 이조 참판 이계전(李季甸)의 처의 남동생입니다. 이조(吏曹)에서 상피(相避)의 법을 무너뜨렸으니, 청컨대, 이를 국문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알고 있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1458년(세종 4) 윤 2월 19일 사간원 좌헌납에 임명되었고, 동년 3월 9일에는 사헌부 지평이 되었는데, 동년 3월 19일에 왕이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사헌부 지평 진유경이 일찌기 제천 현감이 되어 관찰사 이중(李重)의 과실을 전해 듣고 아직도 실상을 얻지 못하고 사헌부에 말하여 계달하게 하지 않았으니, 그 사유를 국문하여 아뢰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 대사헌 황효원(黃孝源)이 아뢰기를, "이중의 일은 신이 최초로 말하였는데, 지평 진유경이 이어서 말하기를, ''''필시 홍산(鴻山)에 기생을 이끌고 간 일이 있어 이로 인하여 부중(府中)의 첨의(僉議)로써 아뢰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진유경 만이 홀로 연루되어 감옥에 있으니, 신도 청컨대 대죄(待罪)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윤허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실정을 보아서 그들 죄를 바르게 하라."라고 하였다. 동년 4월 18일에 지평 진유경이 좌천되는 것으로 이 사건은 끝났다. 1460년(세조 6) 6월 27일에는 인순부 소윤(仁順府少尹)으로서 왕이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政事)를 볼 때 입시하였다. 그 후 벼슬이 직제학에까지 이르렀다.(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醴泉郡誌 1939)


  진유경 [記事] : 세종실록 94권/ 세종 23년(1441 신유 / 명 정통(正統) 6년) 11월 8일(신축) 1번째 기사/ 중량포의 따뜻한 물이 온천인가 하여 윤인과 조경지를 보내다/ 생원 진유경(秦有經) 이 승정원에 고하기를, “ 동대문 밖 중량포(中良浦) 에 물이 조금 따뜻하므로 이것이 온천이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하므로, 상호군(上護軍) 윤인(尹麟) 과 전의 판관(典醫判官) 조경지(曹敬智) 를 보내어 찾기를 명하였으나, 결국 얻지 못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0책 94권 10장 B면/ 【영인본】 4책 369면/ 【분류】 *과학-지학(地學)(history.go.kr 2008)


  진유경 [記事] : 문종실록 1권/ 문종 즉위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3월 5일(기유) 1번째 기사/ 겸 성균 사성 윤상 등이 불사의 불가함을 상소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다/ 겸 성균 사성(兼成均司成) 윤상(尹祥)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신 등이 그윽이 듣건대, 방금 불전(佛殿)을 세우고 불상(佛像)을 만들고 불경을 베껴 쓰고 영락주(瓔絡珠)를 구워 만드는 역사(役事)를 한꺼번에 모두 시작한다 하니, 그 하는 일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에 이 공덕(功德)을 신칙하여 천도(薦導)에 이익이 있다고 한다면 지난번에 소헌 왕후(昭憲王后)께서 병환이 나신 날에 중들을 모아서 금중(禁中)122) 에서 정근(精勤)123) 하여 부처에게 기도하도록 하고, 또 중앙과 지방의 사찰(寺刹)에 모두 분주(奔走)하면서 명명(冥冥)한 가운데서 부처의 가호(加護)를 빌도록 명령하였는데도 마침내 효험을 얻지 못하였는데, 지금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병환이 나신 때에 와서 지성으로 기도함이 전일보다 배나 되었는데도, 또한 조금도 연명(延命)되시지 않았으니, 부처를 믿을 것이 못됨은 이미 명백한 증험이 있습니다. 지금 산릉(山陵)의 역사를 당하여 치장(治葬)하는 준비에 일이 일정한 기한이 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으니, 이때를 당하여 비록 부득이한 일이 있다면, 묘침(廟寢)124) 의 건축일지라도 마땅히 조금 정지시켜야 할 듯한데, 하물며 그만둘 수 있는 불상(佛像)을 만드는 따위의 일이겠습니까? 진실로 정파(停罷)하지 않는다면 그 접대하는 비용이 적지 않을 것이니, 또한 어떻게 지급(支給)하겠습니까? 근년에 흉년이 서로 잇따르게 되어 서울과 지방의 저축이 진대(賑貸)125) 하는 데에 텅 비게 되었는데, 만약 조금 남아있는 자료(資料)를 가지고 다시 이익이 없는 일에 소비한다면, 혹시 연사(年事)가 또 기근(飢饉)이 있든지 변방의 사변(事變)이 또 일어난다면 그 진휼(賑恤)의 준비와 군량(軍糧)의 수용(需用)이 어디로부터 나오겠습니까? 식량(食糧)이란 백성의 가장 중요한 것[天]이고, 식량을 넉넉하게 하는 도리는 다만 농시(農時)를 어기지 않는 데에 있을 뿐인데, 지금 농사일이 바야흐로 한창인 때를 당하여 이익이 없는 일을 서두르겠습니까? 하물며 전하께서 왕위(王位)를 계승하신 초기에 온갖 교화(敎化)가 새롭게 되므로, 신민(臣民)들이 새 정치를 우러러 바라보고서 그 종말이 어찌 될 것을 점치고 있으니, 한 가지도 이 백성들의 본보기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지금 최질(衰?) 중에 계시니, 한결같이 성현(聖賢)의 제도를 따라서 그 상례(喪禮)를 다할 뿐인데, 만약 부처를 섬기는 일에 먼저 서두른다면 신민(臣民)들은 모두 생각하기를, ‘전하의 성명(聖明)하신 자질로서 부처에게 귀의(歸依)하는 근실(勤實)이 이같이 빠르시다면 하물며 우리 어리석은 무리들이야 감히 우러러보고 받들지 않겠는가?’ 하면서, 다투어 시여(施與)를 희사(喜捨)하여 가재(家財)를 기울여 파산(破産)하게 되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을 것이니,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일월(日月) 같은 밝은 마음을 돌리셔서 불상(佛像)을 만들고 절을 세우고 불경을 베껴 쓰고 구슬을 구워 만드는 명을 빨리 거두어 들여서 신민(臣民)들의 시청(視聽)을 새롭게 하소서.” 하였다.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이효장(李孝長) ·성균 박사(成均博士) 김위(金?) ·


  교서랑(校書郞) 진유경(秦有經)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군주(君主)의 한 마음은 온갖 교화(敎化)의 근원이므로 생민(生民)의 휴척(休戚)과 국가의 안위(安危)가 한 생각의 공경함과 소홀함의 사이에 달려 있으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태조(太祖)께서 창업(創業)하신 이래로 역대의 임금이 서로 계승하시어 정치를 하는 도리는 언제나 고대(古代)의 제왕을 본받아서 중앙과 지방이 편안하고 만백성이 기쁘게 복종한 지가 지금 60년이나 되었습니다. 생민(生民)이 복이 없고 하늘이 은혜를 베풀지 않아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갑자기 신민(臣民)들을 버리고 가시니 사방에서 허둥지둥하면서 친부모[考?]를 잃은 듯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교지(敎旨)를 듣고는 백성들이 비록 늙고 쇠약하고 꼽추일지라도 모두가 지팡이를 짚고 목을 길게 빼고서 조종(祖宗)의 치화(治化)126) 를 생각해 바라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바로 전하께서 조종(祖宗)의 정치를 본받아 유신(維新)의 교화를 펴서 그 시초를 근신하여 민심(民心)을 수습할 시기입니다. 다른 일에 미치는 여가가 없을 것인데도 절을 세우고 불상(佛像)을 만들고 불경을 인쇄하고 불경을 베껴 쓰는 데 서두르고 불전(佛殿)의 장엄(莊嚴)함에 모두 사치와 화려함을 극도로 하였으니, 그 노력과 비용이 어찌 거만(巨萬)127) 뿐이겠습니까? 비록 민심(民心)이 평소부터 복종하고 재용(財用)이 여유가 있는 때를 당하더라도 군주는 마땅히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해야 할 것이고, 이익이 없는 일로써 재물을 손상시켜 백성을 해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바야흐로 처음 정사를 하는 시기에 있어 덕택(德澤)이 흡족하지 못하고 용도(用度)가 대단히 많으므로 국가의 재용(財用)이 텅 비어 없게 되었는데, 전하께서는 일찍이 이를 염려하지 않으시고 공역(工役)을 크게 일으켜 불교(佛敎)를 섬기는 것으로써 첫 정치의 선무(先務)로 삼으시니,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이 방도(方道)로써 조종(祖宗)의 성덕(盛德)을 계승하겠으며, 이 방도(方道)로써 국가의 명맥(命脈)을 한없는 지경까지 연장하시겠습니까? 대성(臺省)·시종(侍從)·좌우(左右)의 신하들이 모두 ‘옳지 못합니다.’고 하면서 굳이 정파(停罷)하기를 청하였는데도 전하께서는 거절하여 들어 주지 않으시니 종사(宗社)·생민(生民)의 복(福)이 심히 아닙니다. 전하께서 간신(諫臣)에게 하교하기를, ‘나는 진실로 부처를 섬겨 천도(薦導)하는 일로써 선왕(先王)에게 이익이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으로 그대들의 말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만약 그렇다면 여러 신하들이 중지하기를 간(諫)하는 것은 이것이 모두 임금에게 충성하지 못하고 선왕(先王)에게 유익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부처를 섬기는 일이 무익(無益)함을 상세히 알고, 백성이 실망(失望)하고 재용(財用)이 허갈(虛竭)되어 나라의 형세가 위태함을 초래한 것을 깊이 염려한 까닭으로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말을 올려 능히 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릇 태종(太宗)께서 사사(寺社)를 혁파(革罷)하고 노비(奴婢)를 거두어 들여 고려(高麗) 의 여러 해 동안의 해독을 과감하게 제거하였으며,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왕위에 있은 지 30년 동안에 불교를 배척하고 승려(僧侶)를 도태(淘汰)시키는 것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었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명백히 아시는 바입니다. 다만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만년(晩年)에 정치하는 일에 피로하시어 모든 정무(政務)를 전하에게 위촉하시고 한가로이 즐겁게 휴양(休養)하면서 우연히 불당(佛堂)에서 중들에게 잿밥 먹인 일이 있었던 것인데, 전하께서는 어찌해서 즉위(卽位)하신 지가 한 달이 되지 못하였는데도, 도리어 선왕(先王)의 만년(晩年)의 실수를 본받고 선왕(先王)의 정력을 쓰셨던 시대와 태종(太宗) 의 성규(成規)를 본받지 않으십니까?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시초가 있지 않은 이는 없으나 종말이 있는 이가 적다.’고 하였으니, 시초를 근신하지 않는데 신 등은 그 종말이 어찌 될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통곡할 만한 것이 이 일입니다. 또 후궁(後宮)이 머리를 깎는 것은 신 등이 더욱 더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태종(太宗) 께서 승하(昇遐)하실 때에 후궁(後宮)이 머리를 깎으려고 하는 이가 있으므로,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옳지 않다고 하여 이를 중지시켰었는데, 지금은 어찌 그렇지 않고 마침내 계액 초방(桂掖椒房)128) 으로 하여금 도리어 방포(方袍)129) 가 거처하는 곳으로 삼아서 사망(邪妄)의 화(禍)를 궁중(宮中)으로부터 인도하게 되니, 신 등은 매우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과단성 있는 결단을 널리 발휘하시고 여러 사람의 심정(心情)을 굽어 따르셔서 이익이 없는 비용을 빨리 중지시키고 후궁(後宮)이 여승(女僧) 되는 것을 금지시켜 나라의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나라의 근원을 튼튼하게 하여 종묘(宗廟)·사직(社稷)을 편안하게 하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인하여 윤상(尹祥)과 삼관(三館)130) 등에게 전교(傳敎)하기를, “그대들의 말도 대간(臺諫)의 말과 다름이 없다.”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6장 B면/ 【영인본】 6책 222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재정(財政) / *건설(建設)/ [註 122]금중(禁中) : 대궐 안. ☞ / [註 123]정근(精勤) : 중들이나 무당을 모아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빌던 일. ☞ / [註 124]묘침(廟寢) : 종묘(宗廟). ☞ / [註 125]진대(賑貸) : 재난이나 흉년(凶年)이 든 해에 나라에서 곡식을 풀어서 어려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던 일. ☞ / [註 126]치화(治化) : 착한 정치로 백성을 교화함. ☞ / [註 127]거만(巨萬) : 많은 수량. ☞ / [註 128]계액 초방(桂掖椒房) : 후비(后妃)의 궁전. ☞ / [註 129]방포(方袍) : 중이 입는 도포. ☞ / [註 130]삼관(三館) :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 및 교서관(校書館). ☞(history.go.kr 2008)


  진유경 [記事] : 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8월 7일(무인) 4번째 기사/ 장령 하위지가 관직 제수의 균평하지 못함을 바로 잡도록 아뢰다/ 장령(掌令) 하위지(河緯地)가 아뢰기를, “김신행(金愼行)이 지난 세초(歲抄)622) 에 외임(外任)으로서 체직(遞職)되어 왔는데, 지금 일주년(一周年)이 차기 전에 또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로 임명되었으며, 지정(池淨)은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직(兼職)하였는데, 〈 지정 은〉 정분(鄭?)의 생질(甥姪)로서 정분 에게는 상피(相避)할 처지이나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임명되었으니 모두 법에 어긋난 일입니다. 삼관(三館)623) 에서 수위(首位)에 있는 사람이 지난 세초(歲抄)의 고적(考績)이 중(中)인 경우에는 법으로써는 마땅히 품계(品階)가 같은 다른 관사(官司)에 옮겨 임명되어야 할 것임에도 이조에서 즉시 제수(除授)하지 않더니, 이때에 와서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이효장(李孝長)은 부사직(副司直)으로 임명하고,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김위(金?)는 교수관(敎授官)으로 임명하고, 교서랑(校書郞) 진유경(秦有經)은 행 참군(行參軍)624) 으로 임명하였으므로 그 관직 임명이 또 균평(均平)하지 못하였으니 개정(改正)하기를 청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지정(池淨)은 아랫사람이 계청(啓請)한 것은 아니나, 곧 특지(特旨)로 임명된 것이며, 김신행(金愼行)은 무과(武科) 출신으로써 인품(人稟)과 재간(才幹)이 서로 합당한 셈이다. 삼관(三館)의 일은 그 당시에 이조(吏曹)에서 계청했으나 벼슬자리의 결원(缺員)이 모자란 것을 내가 모두 이를 알고 있다.”하였다. 하위지(河緯地)는 순진하고 정직하여 공무(工務)만 위하고 사사(私事)는 잊어서, 세종조(世宗朝) 에 있어서도 매양 소(疏)를 올려 폐단을 진술하니 대우가 매우 융숭했는데, 임금께서 즉위하시자 직집현전(直集賢殿)의 직무로서 윤대(輪對)하여 해가져야만 그제서야 나가게 되니, 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마침내 날마다 입대(入對)하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8장 A면/ 【영인본】 6책 268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정론(政論)/ [註 622]세초(歲抄) : 조선조 때 매년 6월과 12월에 이조와 병조에서 관리의 근무 성적을 고과(考課)하여 승진시키고 좌천시키던 일. ☞ / [註 623]삼관(三館) : 예문관(藝文館)·교서관(校書館)·성균관(成均館). ☞ / [註 624]행 참군(行參軍) : 7품 이상의 품계(品階)의 사람이 7품의 참군(參軍)에 임명되었을 때 부르던 칭호. 참군은 국초에 개성부(開城府)와 훈련관(訓鍊官)에 딸린 7품의 무관(武官) 벼슬임. ☞(history.go.kr 2008)


  진유경 [記事] : 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8월 8일(기묘) 5번째 기사/ 사헌부에서 성득식의 이조 참의 제수가 불가함을 아뢰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이조(吏曹)는 직무가 인물(人物)을 전형(銓衡) 선발하는 일을 관장(管掌)하고 있으니 인물을 전형(銓衡)하는 그 임무는 지극히 중대합니다. 성득식(成得識)은 조부(祖父)의 음덕(蔭德)을 받아 관직이 대부(大夫)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오히려 만족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국가에는 한 가지 공로도 없으며, 또 인망(人望)도 없으니 마땅히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제수(除授)할 수는 없습니다.”하였다. 또 삼관(三館)의 거관(去官)하는 일과 김신행(金愼行)의 일에 대하여 두 번이나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성득식(成得識)은 특지(特旨)에 의한 것이고, 김신행(金愼行)은 무신(武臣)이므로 변방의 고을에 합당하니 모두 고칠 수는 없으며, 삼관(三館)의 일은 이조(吏曹)에 명령하여 마감(磨勘)하도록 하였다.”했다. 처음에 생원(生員) 최인근(崔仁近)이란 사람이 삼관(三館)의 관원에게 예를 하지 않으니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이효장(李孝長)·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김위(金?)·교서랑(校書郞) 진유경(秦宥經) 등이 모두 삼관(三館)의 행수(行首)로서 동료(同僚)를 거느리고 성균관(成均館)에 모여서 처벌을 의논하려고 하니, 최인근(崔仁近)이 복종하지 않고서 달려나가 예조 판서(禮曹判書) 허후(許?)에게 호소하므로, 허후가 성균관(成均館)으로 하여금 논보(論報)하게 하고, 마침내 삼관(三館)에서 유생(儒生)을 함부로 처벌할 수 없는 법을 제정하고, 또 전최(殿最)641) 에 있어서도 행수 장무(行首掌務)를 모두 중등(中等)에 두고, 또한 고적(考績)이 중등(中等)인 사람을 품계(品階)가 같은 다른 관사(官司)에 옮겨 임명하여 다음에 있는 사람으로서 천전(遷轉)시키는 법을 제정하였다. 대개 건국 초기로부터 삼관(三館)642) 의 관원이 성균관(成均館)에 모여서 무례(無禮)한 유생(儒生)들을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서 처벌하였는데, 이로부터 이후로는 유생(儒生)이 선배(先輩)를 업신여기는 일이 대단하였다. 허후(許?) 는 밖으로는 정직한 체하면서도 안으로는 간교(姦巧)하며 겉으로는 사람들을 무마(撫摩)하면서도 속으로는 실상 헐뜯었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1장 A면/ 【영인본】 6책 270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사법-법제(法制)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정론(政論) / *인물(人物)/ [註 641]전최(殿最) : 도목 정사(都目政事)에서 관리의 근무 성적을 평정할 때 하등에 속하는 것을 전(殿)이라 하고, 상등에 속하는 것을 최(最)라고 하였음. ☞ / [註 642]삼관(三館) : 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예문관(藝文館). ☞(history.go.kr 2008)


  진유경 [記事] : 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8월 15일(병술) 3번째 기사/ 정언 홍일동이 두목의 일과 김양경·진유경 등의 관직 개정을 아뢰다/ 정언(正言) 홍일동(洪逸童)이 아뢰기를, “신 등이 듣건대, 두목(頭目)이 모화관(慕華館) 등지에 혼자서 다닌다고 하는데, 신 등은 생각하기를, 두목(頭目)이 통사(通事)도 없이 드나드는 것은, 국가에서 사신을 존대(尊待)하는 뜻을 전혀 잃은 것이라 여깁니다. 〈사신이〉 혹은 말에서 떨어져 스스로 상처를 입을는지, 혹은 길가에서 폐를 끼치게 될는지, 누가 능히 이를 알겠습니까? 겸 승문원 부교리(兼承文院副校理) 조근(趙瑾)은 황보인(皇甫仁)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종을 거느리고 북경(北京) 에 가려고 하니, 조근은 이 행차에 있고 없는 것이 관계가 없으니, 청컨대 종을 거느리고 가지 못하게 하소서. 이염의(李念義)는 그 전에 장죄(贓罪)를 범했는데, 추핵(推?)을 지체시킨 이유로써 그 당시 감사(監司)의 차사원(差使員)을 파면시켰는데, 처벌은 진실로 죄를 당해야 하니, 다만 그 수령관(首領官)667) 과 차사(差使)를 같이 받은 수령(守令)만은 홀로 면할 수가 없습니다. 교서관(校書館)에서 관직을 떠나면 세초(歲抄)에는 경관(京官)의 6품을 제수(除授)하고 6월에는 외관(外官)의 6품을 제수(除授)하는 것이 예(例)인데, 교서랑(校書郞) 김양경(金良璥)은 마땅히 외관을 임명해야 할 것인데도 승문원 부교리(承文院副校理)로 제수했으며, 진유경(秦宥經)은 마땅히 경관(京官)의 6품을 임명해야 할 것인데도 강등(降等)시켜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으로 제수했으니 모두가 적당하지 못하므로, 이를 개정(改正)하기를 청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목(頭目)이 〈통사도 없이〉 드나드는 것은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이를 묻도록 하겠고, 김양경(金良璥) 등의 일은 내가 마땅히 이조(吏曹)에 물어보겠다. 다만 이염의(李念義)의 일에 대해서는, 이미 이 일로써 감사(監司)의 차사원(差使員)만 파면시키면 이미 만족할 터인데 또 어찌 다른 사람에게 죄를 가할 수가 있겠는가? 조근(趙瑾)이 종인(從人)을 거느리고 가는 것은 이미 전례(前例)가 있으며, 하물며 조근은 별례(別例)로 북경(北京) 에 가는 것이겠는가?”하였다. 홍일동(洪逸童)이 이염의(李念義)의 일에 대하여 다시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수령관(首領官)은 끝내 처벌할 수 없으며, 차사원(差使員)은 형조(刑曹)로 하여금 추핵(推?)하도록 하겠다.”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5장 A면/ 【영인본】 6책 272면/ 【분류】 *외교-명(明)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註 667]수령관(首領官) : 조선조 때 감영(監營)이나 병영(兵營)·수영(水營)에서 관찰사(觀察使)나 절제사(節制使)를 보좌하던 경력(經歷)이나 도사(都事)를 일컬음. ☞(history.go.kr 2008)


  진유경 [記事] : 단종실록 5권/ 단종 1년(1453 계유 / 명 경태(景泰) 4년) 2월 18일(을사) 3번째 기사/ 지평 신자승이 정분을 추문할 것과 진유경을 국문할 것을 청하나 윤허하지 않다/ 지평(持平) 신자승(申自繩)이 본부(本府)1004) 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 현릉(顯陵) 1005) 의 일은 정분(鄭?)이 시종 전장(專掌)하였으니, 청컨대 이를 반드시 추문(推問)하소서. 그리고, 진유경(秦有經)을 제천 현감(堤川縣監)으로 삼았는데, 진유경은 이조 참판 이계전(李季甸)의 처제(妻弟)입니다. 지난번에 판서(判書) 민신(閔伸)의 처형(妻兄) 신전(愼詮)을 예문 직제학(藝文直提學)으로 삼았으므로, 본부에서 논계(論啓)하기를 두세 번이나 하였는데, 윤허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조에서 꾀하기를 지금도 이와 같이 하여 상피의 법을 무너뜨렸으니, 청컨대 이를 국문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모두 내가 알고 있는 바다.”하였다. 신자승이 다시 아뢰기를, “ 정분의 일은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에 관계되니 가볍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15장 B면/ 【영인본】 6책 568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사(宗社)/ [註 1004]본부(本府) : 사헌부. ☞ / [註 1005] 현릉(顯陵) : 문종(文宗)의 능(陵). ☞(history.go.kr 2008)


  진유경 [記事] : 세조실록 11권/ 세조 4년(1458 무인 / 명 천순(天順) 2년) 윤2월 19일(정축) 4번째 기사/ 어효첨·송처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어효첨(魚孝瞻)을 형조 참판으로, 송처관(宋處寬)을 공조 참판으로, 유하(柳河)를 인순부 윤으로, 진유경(秦有經)을 사간원 좌헌납(司諫院左獻納)으로, 구치관(具致寬)을 평안도 병마 도절제사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4책 11권 25장 B면/ 【영인본】 7책 260면/ 【분류】 *인사-임면(任免)(history.go.kr 2008)
  진유경 [記事] : 세조실록 12권/ 세조 4년(1458 무인 / 명 천순(天順) 2년) 3월 9일(병신) 2번째 기사/ 홍원용·김연지·예승석·진유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원용(洪元用)을 한성부 윤으로, 김연지(金連枝)를 행 첨지중추원사로, 예승석(芮承錫)을 사간원 좌헌납(司諫院左獻納)으로, 진유경(秦有經)을 사헌 지평(司憲持平)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5책 12권 1장 B면/ 【영인본】 7책 26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history.go.kr 2008)


  진유경 [記事] : 세조실록 12권/ 세조 4년(1458 무인 / 명 천순(天順) 2년) 3월 19일(병오) 3번째 기사/ 관찰사 이중의 과실을 보고하지 않은 사헌 지평 진유경을 국문케 하다/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사헌 지평(司憲持平) 진유경(秦有經)이 일찍이 제천 현감(堤川縣監)이 되어 관찰사 이중(李重)의 과실(過失)을 전해 듣고, 아직도 실상(實相)을 얻지 못하고 본부(本府)에 말하여 계달하게 하지 않았으니, 그 정유(情由)를 국문하여 아뢰라.”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12권 4장 B면/ 【영인본】 7책 263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history.go.kr 2008)


  진유경 [記事] : 세조실록 12권/ 세조 4년(1458 무인 / 명 천순(天順) 2년) 3월 20일(정미) 2번째 기사/ 대사헌 황효원이 지평 진유경이 계옥된 일로 대죄를 청하다/ 대사헌 황효원(黃孝源)이 아뢰기를, “ 이중(李重)의 일은 신이 최초로 말하였는데, 지평(持平) 진유경(秦有經)이 이어서 말하기를, ‘필시 홍산(鴻山)에 기생을 이끌고 간 일이 있어, 이로 인하여 부중(府中)의 첨의(僉議)로써 아뢰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진유경만이 홀로 계옥(繫獄)되었으니, 신도 청컨대 대죄(待罪)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윤허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실정을 보아서 그 죄를 바루게 하라.”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12권 4장 B면/ 【영인본】 7책 263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윤리(倫理) / *사법(司法) / *인사-임면(任免)(history.go.kr 2008)


  진유경 [記事] : 세조실록 12권/ 세조 4년(1458 무인 / 명 천순(天順) 2년) 4월 18일(을해) 3번째 기사/ 이중의 비행을 거짓 고한 지평 진유경을 좌천시키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지평(持平) 진유경(秦有經)은 이중(李重)이 일찍이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기생을 데리고 홍산(鴻山)에 갔었다고 거짓 아뢰었으니, 율(律)이 장(杖) 1백 대에 도(徒) 3년에 해당합니다.” 하니, 명하여 정부에 의논하게 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본률(本律)로 연좌되면 너무 과(過)한 것 같습니다.”하니, 임금이 단지 좌천(左遷)만 시키고, 명하여 대사헌 이하는 모두 직사에 나아가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12권 11장 A면/ 【영인본】 7책 266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history.go.kr 2008)


  진유경 [記事] : 세조실록 20권/ 세조 6년(1460 경진 / 명 천순(天順) 4년) 6월 27일(임신) 1번째 기사/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다/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는데,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서강(徐岡), 사예(司藝) 공기(孔?)·이계손(李繼孫)·정종소(鄭從韶), 인순부 소윤(仁順府少尹) 진유경(秦有經), 직강(直講) 권이경(權以經) 등이 윤대(輪對)하니, 술자리를 베풀었다.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이조 판서(吏曹判書) 구치관(具致寬)·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질(金?)과 승지(承旨)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공기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 임금이 그 소매를 잡으면서 말하기를, “ 공기는 내가 본래 서로 알던 자이다.”하였다. 서강 등이 명경과(明經科)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겨 즉시 명일부터 과장(科場)을 열어 조사(朝士)와 원점(圓點)4396) 이 70이상 찬자에게 시험에 나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계몽(啓蒙)》 에 약통(略通)하고, 사서(四書)중에 추첨(抽籤)한 1서(書)에 통(通)하고, 오경(五經) 중에 자원(自願)한 2경(經)에 통(通)하고, 《좌전(左傳)》·《강목(綱目)》·《자치(資治)》·《속편(續編)》·《송원절요(宋元節要)》 중에서 자원한 1서(書)에 약통(略通) 이상인 자는 전시(殿試)에 나오도록 허락하고, 초시(初試)에서는 정원(定員)의 숫자에 구애하지 말게 하였다. 예조(禮曹)·병조(兵曹)에 전지(傳旨)하기를, “명경과(明經科)와 무거(武擧)를 시험보이고자 하니,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일을 준비하라.”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책 20권 44장 A면/ 【영인본】 7책 405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인사-선발(選拔)/ [註 4396]원점(圓點) :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들이 식당(食堂)에 들어갈 때 도기(到記)에 찍던 점. 아침·저녁 두 끼에 1점을 주었음. ☞(history.go.kr 2008)


  진유경 [記事] : 세조실록 28권/ 세조 8년(1462 임오 / 명 천순(天順) 6년) 4월 17일(임오) 2번째 기사/ 악학 도감에서 사사로이 여기를 빌린 송극창 등에게 태 40대를 속(贖)바치게 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악학 도감사(樂學都監使) 송의(宋衣)·부사(副使) 정침(鄭沈), 판관(判官) 조이(趙怡)·권이순(權以順) 등은 사사로이 여기(女妓)를 빌려 주어 배워 익히지 못하게 하였고, 행 사용(行司勇) 윤담(尹澹)·행 사정(行司正) 김승서(金承緖)·행 사직(行司直) 이종윤(李從胤)·전 전첨(典籤) 이계정(李季町)·행 직장(行直長) 정유의(鄭有義), 사인(舍人) 권윤(權綸)· 정문형(鄭文炯), 검상(檢詳) 박건(朴楗), 정랑(正郞) 이인견(李仁堅) ·성윤문(成允文)·이원효(李元孝)·이숭원(李崇元)·권이경(權以經)·김성원(金性源)·정기(鄭沂)·신승선(愼承善), 좌랑(佐郞) 정괄(鄭?)·김승경(金升卿)·남칭(南?)·송극창(宋克昌)·정난종(鄭蘭宗)·어세겸(魚世謙)·조서정(趙瑞廷)·조숙종(趙叔宗)·최호(崔灝), 전 좌랑(佐郞) 정효상(鄭孝常)·감찰(監察) 최정(崔?)·주부(注簿) 정칭(鄭?), 소윤(少尹) 진유경(秦有經)·원맹수(元孟?), 경력(經歷) 권체(權體), 별좌(別坐) 안종도(安從道)·조극함(趙克?)·송선충(宋善忠), 전 판관(判官) 박확(朴擴), 장사랑(將仕郞) 김경춘(金慶春)·김민(金旼) 등은 여기(女妓)를 불러서 회음(會飮)하였으니, 죄가 아울러 장(杖) 80대에 해당합니다.”하니, 명하여 송극창·정난종·조극함·김경춘은 태(笞) 40대를 속(贖)바치게 하고, 나머지는 논하지 말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0책 28권 11장 B면/ 【영인본】 7책 529면/ 【분류】 *신분-천인(賤人) / *예술-음악(音樂) / *사법-재판(裁判)(history.go.kr 2008)


---


  ▲예천방문 362


  삼강주막(醴泉郡, 대보름 三江酒幕 달집태우기 行事 : 洛東江 살리고 經濟難局 克服 祈願) [記事] :


  예천군에서는 우리 고유의 세시풍속인 정월 대보름날인 2009년 2월 9일 오후 5시30분부터 8시까지 김수남 예천군수를 비롯한 기관단체장, 지역주민 등 6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풍양면 삼강리 삼강주막 나루터 백사장에서 달집태우기 행사를 갖는다.


  이번에 실시하는 달집태우기는 예천군이 주최하고 사단법인 예천군새마을회(회장 이철우)가 주관하는 행사로서 예천군 발전과 군민의 안녕을 기원하고, 경북도청 이전에 따른 신도시건설 성공을 기원하며 낙동강을 살리고 경제난국 극복을 기원하기 위해 개최하게 되었다.


  이날 행사는 무형문화재 제10호인 공처농요의 민속놀이 한마당을 시작으로 소원지 달기, 낙동강 살리기 및 경제살리기 결의문 낭독, 달집 점화, 달 보며 소원 빌기에 이어 풍물패와 군민이 함께하는 대동마당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며, 참가자에게는 막걸리, 손두부, 묵, 전 등 간단한 먹거리도 제공할 계획으로 있다.


  특히, 삼강주막에서 행사를 갖게 된 것은 삼강주막이 낙동강 1300리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조선시대 마지막 주막이라는 역사적 가치와 함께 영남의 상징성을 간직한 곳에서 낙동강 물길도 살리고, 일자리도 창출하고, 경제도 살려보자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김수남 예천군수는 참석자들에게 대보름 달집태우기는 풍요로움과 부정과 사악을 살라버리는 정화의 상징으로 부족함이 없는 넉넉함이며 질병도 근심도 없는 밝은 새해를 맞는다는 희망이 담겨져 있다고 말하고 오늘 이 행사를 계기로 우리 예천이 새 경북의 중심에 서서 희망찬 미래를 이끌어 가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다하자고 강조한다.


  (손호동 記者, 2009-02-07 FM-TV 標準放送 2009-02-07 오후 3:34:03)


---


 용궁향교(龍宮鄕校) [硏究物] : 용궁면 향석리 용궁향교에 대한 연구물로,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1991년에 간행한 <경북향교지> 제2편 각론 38에 751쪽부터 14쪽 분량이 수록되어 있다.(인터넷 야후 2001)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담당관전산정보팀(☎ 054-650-6074)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페이지만족도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성에 만족하시나요?

소통마당경북의 중심 예천군

자유게시판 [1118쪽]페이지의  홈페이지URL 정보를 담고 있는 QR Code 입니다. 홈페이지 주소는 https://ycg.kr/open.content/ko/participate/free.bulletin/?i=26780&p=1118 입니다.

이 QR Code는 현재 보시는 <자유게시판 [1118쪽]페이지>의 홈페이지URL 정보를 담고 있는 QR Code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