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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 1833:예천충효32(附 예천방문 359)
작성자장병창 @ 2009.02.05 07:03:12

  예천의 자랑(1833) : 예천 충효 32(附 예천방문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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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승본리 심재택정효각(沈載澤旌孝閣) [碑閣] : 보문면 승본리 115번지 동막(東幕)에 있는 목조와가 비각(木造瓦家碑閣)으로, 청송인 효자 심재택을 위해 국가에서 1905년에 세웠다. 비명(碑銘)은 "증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 청송 심공재택지비(贈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靑松沈公載澤之碑)"이다.


  심재택 정효비(沈載澤 旌孝碑) [碑] : 보문면 승본리 143번지(垈)에 있는 비로, 정효각 내에 있다. 비는 비좌(碑座)와 옥개형(屋蓋形) 지붕이 있는 형태로, 비신 전면 중앙에 ''''孝子贈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靑松沈公載澤之碑''''가 새겨져있고, 측면에는 ''''乙巳三月日...''''의 건비년대(建碑年代)가 새겨져 있다. 비좌의 높이 8cm, 너비 77cm, 비신 높이는 127cm, 너비 47cm, 두께 17cm이고, 가첨석(加 石)의 크기는 높이 44cm, 너비 75cm, 두께 45cm이다. 자경(字徑)은 10x11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승본리 심재택 정효비(醴泉繩本里 沈載澤 旌孝碑) [碑] : 보문면 승본리 143번지(垈)에 있는 비로, 정효각 내에 있다. 비는 비좌(碑座)와 옥개형(屋蓋形) 지붕이 있는 형태로, 비신 전면 중앙에 ''''孝子贈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靑松沈公載澤之碑''''가 새겨져있고, 측면에는 ''''乙巳三月日...''''의 건비년대(建碑年代)가 새겨져 있다. 비좌의 높이 8cm, 너비 77cm, 비신 높이는 127cm, 너비 47cm, 두께 17cm이고, 가첨석(加 石)의 크기는 높이 44cm, 너비 75cm, 두께 45cm이다. 자경(字徑)은 10x11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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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신월리 진주하씨정려각(晋州河氏旌閭閣) [碑閣] : 보문면 신월리 53-1번지 진탄(陳灘)에 있는 목조와가 비각(木造瓦家碑閣)으로, 1926년에 경주인 이방장(李邦章, 號 竹窩, 1843-1892)의 아내 진주 하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유림(儒林)에서 세웠다. 하씨(河氏)는 경활(景活)의 딸, 16세에 출가(出嫁)하여 6년만에 시아버지(李景재)가 중환(重患)에 걸렸다. 그 날부터 12년 간 그녀는 제단(祭壇)을 차려놓고 매일 하늘에 기도를 드리며 열 손가락의 손톱이 모두 빠질 정도로 정성껏 간호하여 기어이 시아버지의 병을 완쾌토록 하였다. 그 후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애통해 함이 지극했는데 어느 도승(道僧)의 인도로 감천면 장산리 가좌골(加佐谷)에 묘터를 정하고 장례(葬禮)를 치루었다. 그러나 산주의 고소로 남편은 안동 감영(監營)에 갇히게 되었다. 그 날부터 무죄로 석방될 때까지 10여 년 간 남편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안동까지 70리 길을 걸어다니면서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이러한 그의 효성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남편에게는 가선대부 내부 협판(嘉善大夫內部協辦)이 증직(贈職)되고, 하씨(河氏)에게는 정효각(旌孝閣)이 세워졌다. 또 1934년 하씨 정효각 바로 우측 곁에 남편을 위한 감공각(感恭閣)이 세워져 부부의 효행을 길이 사람들의 가슴에 남도록 했다.


  진주하씨 효부비(晋州河氏 孝婦碑) [碑] : 보문면 신월리 53-1번지에 있는 비로, 정효각 내에 있다. 비는 비좌(碑座)와 옥개형(屋蓋形) 지붕이 있는 형태로, 비신 전면 중앙에 ''''孝婦贈貞夫人晋州河氏之碑''''가 새겨져 있고, 측면에 ''''丙寅十月日''''의 건비연대(建碑年代)가 새겨져 있다. 비좌의 크기는 높이 7cm, 너비 80cm, 비신의 높이 121cm, 너비 47cm, 가첨석(加 石)의 높이 38cm, 너비 84cm, 두께 55cm이다. 자경(字徑)은 11x13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신월리 진주하씨 효부비(醴泉新月里 晋州河氏 孝婦碑) [碑] : 보문면 신월리 53-1번지에 있는 비로, 정효각 내에 있다. 비는 비좌(碑座)와 옥개형(屋蓋形) 지붕이 있는 형태로, 비신 전면 중앙에 ''''孝婦贈貞夫人晋州河氏之碑''''가 새겨져 있고, 측면에 ''''丙寅十月日''''의 건비연대(建碑年代)가 새겨져 있다. 비좌의 크기는 높이 7cm, 너비 80cm, 비신의 높이 121cm, 너비 47cm, 가첨석(加 石)의 높이 38cm, 너비 84cm, 두께 55cm이다. 자경(字徑)은 11x13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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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신음리 남극후극회형제정효각(南極厚極會兄弟旌孝閣), 예천신음리 정효각(醴泉新陰里旌孝閣) [碑閣] : 개포면 신음리 167번지 개포우체국(開浦郵遞局) 앞에 있는 목조와가(木造瓦家) 비각으로, 1890년(고종 27)에 영양 남씨(英陽南氏)들이 세웠다. 비명(碑銘)은, "효자 증 통정대부 좌부승지 남극후 증 조봉대부 동몽교관 남극회 형제지 려(孝子贈通政大夫左副承旨南極厚贈朝奉大夫童蒙敎官南極會兄弟之閭)"이다.


  남극후 남극회 정려비(南極厚 南極會 旌閭碑) [碑] : 개포면 신음리 153-2번지에 있는 비로, 비각은 신음리 우체국 옆에 있다. 1888년(고종 23) 암행어사 이경옥(李敬玉)이 이들 형제의 효행을 목도하고 손수 석공을 불러 개포면 가곡리 한퇴마을 도로변에 마애하여 세웠다. 형에게 통정부부 좌부승지, 아우에게는 조봉대부 동몽교관이 증직되었다. 이경옥이 기록한 ''''정효각 효행기''''가 <용궁향교지> 상권 1004쪽에 수록되어 있다.


  남극후 남극회 효자비(南極厚 南極會 孝子碑) [碑] : 개포면 가곡리 284-1번지(林)에 있는 비로, 영양인 남극후 남극회 형제의 효행을 표창하여 새겼다. 비는 가로 약 3m, 높이 1m의 자연 암반에 별도의 석재를 이용하여 비명(碑銘)을 새긴 후 부착한 형태로, 전면 좌측에 ''''南極厚極會孝子之碑 李敬玉記''''라 새겨져 있고, 우측에 ''''壬申四月日 曾孫德基德祐改竪''''라는 건비년대(建碑年代)가 음각되어 있다. 군지(郡誌)에는 1886년에 정려되었다고 하나 각자(刻字)된 비문으로 보아 1932년 임신년에 새로이 고쳐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 좌측에 2004년 4월에 제작한 비석이 1기가 있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남극후 남극회 효자비(南極厚 南極會 孝子碑) [碑] : 개포면 신음리 160-1번지(林)에 있는 조선시대 비로, 한식 팔작지붕을 가진 정효비각 안에 있다. 가첨석(加 石), 비신(碑身), 구부(龜趺)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 전면에 ''''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南極會 贈通政大夫左副承旨南極厚 兄弟之閭''''라 각자(刻字)되어 있고, 비 좌측에 ''''孝子崇禎紀元後五甲己丑九月日''''의 건비(建碑) 연대가 새겨져 있다. 가첨석의 크기는 폭 44cm, 높이 26cm, 두께 38cm이고, 비신의 크기는 폭 32cm, 높이 100m, 두께 13m이고, 귀부의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100cm, 높이 32cm이며, 자경 5x5.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남극후 남극회 효자정려현판(南極厚 南極會 孝子旌閭懸板) [彫刻] : 개포면 신음리 160-1번지(林)에 있는 조선시대 조각으로, 팔작지붕 정효비각 안에 있다. 현판에 칸을 나누어 ''''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南極厚極會兄弟之閭 聖上十六年己丑十月日''''이라고 적혀 있으며, 현판의 크기는 가로 97cm, 세로 32.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신음리 남극후 남극회 효자비(醴泉新陰里 南極厚 南極會 孝子碑) [碑] : 개포면 신음리 160-1번지(林)에 있는 조선시대 비로, 한식 팔작지붕을 가진 정효비각 안에 있다. 가첨석(加 石), 비신(碑身), 구부(龜趺)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 전면에 ''''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南極會 贈通政大夫左副承旨南極厚 兄弟之閭''''라 각자(刻字)되어 있고, 비 좌측에 ''''孝子崇禎紀元後五甲己丑九月日''''의 건비(建碑) 연대가 새겨져 있다. 가첨석의 크기는 폭 44cm, 높이 26cm, 두께 38cm이고, 비신의 크기는 폭 32cm, 높이 100m, 두께 13m이고, 귀부의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100cm, 높이 32cm이며, 자경 5x5.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예천신음리 남극후 남극회 효자정려현판(醴泉新陰里 南極厚 南極會 孝子旌閭懸板) [彫刻] : 개포면 신음리 160-1번지(林)에 있는 조선시대 조각으로, 팔작지붕 정효비각 안에 있다. 현판에 칸을 나누어 ''''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南極厚極會兄弟之閭 聖上十六年己丑十月日''''이라고 적혀 있으며, 현판의 크기는 가로 97cm, 세로 32.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예천가곡리 남극후 남극회 효자비(醴泉佳谷里 南極厚 南極會 孝子碑) [碑] : 개포면 가곡리 284-1번지(林)에 있는 비로, 영양인 남극후 남극회 형제의 효행을 표창하여 새겼다. 비는 가로 약 3m, 높이 1m의 자연 암반에 별도의 석재를 이용하여 비명(碑銘)을 새긴 후 부착한 형태로, 전면 좌측에 ''''南極厚極會孝子之碑 李敬玉記''''라 새겨져 있고, 우측에 ''''壬申四月日 曾孫德基德祐改竪''''라는 건비년대(建碑年代)가 음각되어 있다. 군지(郡誌)에는 1886년에 정려되었다고 하나 각자(刻字)된 비문으로 보아 1932년 임신년에 새로이 고쳐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 좌측에 2004년 4월에 제작한 비석이 1기가 더 있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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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연천리 효자유허각(醴泉蓮泉里孝子遺墟閣), 비(碑) [碑閣] : 유천면 연천리 갈마리(葛麻里)에 있는 비각으로, 1879년(고종 16)에 세웠다. 비명은, "효자 행가의대부 고유완지 유허비(孝子行嘉義大夫高有完之遺墟碑)"이다. 연안인 이성수(李聲秀)의 기문(記文)이 있고, 고유완(高有完)의 묘는 갈마리 뒷산 비석골에 있다. 1975년 군부대 부지로 편입되어 마을이 철거될 때 이 비각도 함께 부근으로 이전하였다.


  예천연천리 효자유허각(孝子遺墟閣) [터] : 유천면 연천리(蓮泉里) 웃갈마 입구에 있던 비각으로, 개성인 가의대부 고유완(開城人嘉義大夫高有完)을 위해 1879년에 세웠다. 1974년에 비행장 부지로 편입되어 다른 동리(洞里)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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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옥천리 열부비(烈婦碑) [碑] : 보문면 옥천리 어등(魚登) 철도 변에 있는 비로, 1871년에 어등 동민들이 세웠다. 1984년에 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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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용두리 도시복효자비(都始復 孝子碑), 예천용두리 효자비(醴泉龍頭里孝子碑) [碑石] : 1) 상리면 용두리에 있는 효자 야계 도시복(也溪都始復, 1817-1891)의 기념비이다. 원래 예천읍 동본2리 235번지 공설운동장 동쪽 국도 건너편에 1979년 3월 26일에 야계기념사업회(也溪記念事業會)에서 세웠다. 좌대(座臺) 높이는 120cm, 비신(碑身) 높이는 180cm이다. 비명(碑銘)은 "효자야계도시복정려비(孝子也溪都始復旌閭碑)"이고, 배면(背面)에는 예천향교가 주관하고, 박성수(朴成洙) 성균관장(成均館長)이 쓴 비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고자유지효(古者有至孝)..."로 시작한 868자(字)의 내용이다. 1882년 영남을 암행 순찰하던 이도재(李道宰) 어사(御史)가 도내의 많은 효열장(孝烈狀)을 선화당(宣化堂) 앞뜰에서 불에 태우고 있을 때 유독 도 효자의 소장(疏狀)만 날려가는지라 어사는 감탄한 나머지 친히 현지를 방문하여 출천의 효행을 확인한 후 다시 조정으로 포계장(褒啓狀)을 올리고, 그의 행실을 <명심보감속편(明心寶鑑續編)>에 싣도록 했다. 도 효자는 상리면 용두리에서 태어나 효행이 지극한 것이 세상에 알려져 당시 왕명으로 본관장(本官狀) 21통을 비롯 송영장(送營狀) 2통, 군수장(郡守狀) 1통, 관문장(管門狀) 8통, 수의장(繡衣狀) 6통, 병관도부장(竝官到付狀) 2통 등 40여 효행장(孝行狀)을 받은 바 있다. 2) 용두리 야목에 효자 도시복을 위하여 세웠으나, 한국전쟁(1950) 때 없어졌다.


  예천용두리 효자각 [碑閣] : 상리면 용두리(龍頭里)에 있는 효자 도시복(孝子都始復)의 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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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우망리 쌍절각(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兵馬水軍節度 使兼巡察使臣韓.) [記錄] : 경상도 관찰사가 선조 임금에게 보고한 글로, 풍양면 우망리에 있는 쌍절각의 한씨 부인과 정씨 처녀가 임진왜란 때 쌍절암에서 물 속에 뛰어내려 자진한 내용도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前矣祗受有 令書狀內. 事變後死節死事員役孝子烈女等. 前日 朝廷已令抄錄啓 聞矣. 今幾人旌表. 幾人受賞與否及前後陣亡人某郡幾人恤典行未行. 竝爲抄達. 其諸陣中最有功勞而未受賞者及或已賞而不稱其功者. 其前後功勞亦爲附錄以達. 其中陣亡家戶. 則 <171> 勿論貴賤. 依 朝廷公事. 一切復戶勿役. 變後守令終始不離境內. 討賊不懈. 表表有功者及勿論變前後. 守令之勤於治民. 力於奉公. 淸愼自持者. 昏庸不法. 不恤民隱. 貪猾無良者. 竝第其實迹以達. 兵民兩政中最爲方今大弊. 而民不能堪者. 令各邑各令. 詳問父老. 條列成冊上送事有 令是白乎味. 書狀是白有亦. 相考爲白乎矣. 孝子烈女段. 前因 朝廷公事. 慶州居幼學鄭三孝等十二人. 軍威居幼學蔣珍居十三人. 再次啓 聞後. 旌表褒賞事. 時未下來爲白有齊. <172> 陣亡人段. 比安鄕兵將幼學金喜. 軍威代將校生張士珍. 慶州 訓鍊奉事 金庸. 昌寧前僉使 孫仁甲. 禮安義兵成均權知 柳宗介等. 已曾啓聞後. 孫仁甲段兵曹判書. 金喜段戶曹正郞. 張士珍段慶尙左水使. 金庸段釜山僉使. 柳宗介段禮曹參議爲如追 贈. 其餘表表人段. 本道以各其本官. 優給食物. 以慰妻子爲白在果. 各陣軍士之戰死者極多. 勢難一一表出爲白齊. 有功勞而未受賞者已賞. 而不稱其功者段. 道內戰功之人. 卽時無遺馳 啓. 有司按例論賞. 似無未盡者是白在果. 其中梁山郡守 邊夢龍 <173> 段. 自壬辰八月. 至于今日. 常在賊藪. 苦守其境. 終始不離?不喩. 龍堂賊船不知其數來泊之時. 因風縱火. 焚三十餘隻. 賊倭燒死者甚多. 其後亦多斬獲之功. 大丘河濱縣義兵將朴忠後段. 大丘賊屯據之時. 夜擊斬倭. 連續獻?. 前後通計. 幾至百餘級. 左道義兵之中. 其功獨茂. 盈德縣令 安璡段. 變初嶺東賊. 或七八名或十餘名. 潛逃下來時. 聚軍設策. 這這捕斬. 一日倭賊十餘人. 入於民家. 又與淸河縣監 鄭應聖合力. 無遺燒殺. 迎日縣監 洪昌世段. 壬辰五月間. 長?等處. 賊船來泊下陸. 昌世冒死力戰. 斬?亦 <174> 多. 當其時賊勢滔天. 人皆崩潰. 奔竄恐後. 莫可收拾. 安璡 昌世等. 獨先竭力捕賊. 其功尤有可嘉者是白乎矣. 邊夢龍 安璡段. 只陞副正. 洪昌世段. 只陞僉正. 朴忠後段. 終無褒典. 人頗以爲賞不稱功是如爲白齊. 前都事 金隷男. 自變初爲右道都事. 專總兵戎之政. 或自領軍. 或指揮諸將. 竭力奔走. 勞效最著. 安東府使 禹伏龍. 變初爲龍宮守. 當兇賊長驅北上之日. 聞慶 咸昌 ?基 醴泉 比安等官隣邑守令. 莫不棄城遠遁. 伏龍獨守其邑. 終始不離. 指揮軍卒. 捕賊亦多. 眞寶縣監 金希契. 變生 <175>


  之初. 遠近洶沸. 獨能苦守其邑. 鎭定民心. 又與盈德縣令 安璡. 丑山浦萬戶 吳士淸. 淸河縣監 鄭應星. 興海郡守 崔輔臣等. 相與結約. 召聚起軍. 其後領兵於醴泉. 設伏於仁同. 皆有力戰之功. 亦有所自斬者. 軍威縣監 柳澈. 賊兵久據其邑. 四出焚蕩. 幾爲賊所害者. 非止一再. 而終不離其地. 其後指揮代將張士珍等. 或設伏或接戰. 斬賊三十餘級. 前仁同縣監 趙詹. 曾爲本邑守. 賊藪不遠之地. 苦守不去. 指揮邑人. 殺賊甚多爲白在果. 禹伏龍段. 朝廷論賞. 已陞堂上. 柳澈段. 臣之四寸弟. 似當避嫌. 旣承 下問. 不 <176> 敢不以實對爲白齊. 陣亡家戶一切復戶事段. 依令下辭緣. 已爲行移施行爲白乎爾. 最爲方今大弊而民不能堪者. 令各邑守令. 詳問父老上送事段置. 一依有令內辭緣. 行移知委爲白乎爾. 孝子烈女及各陣戰亡人. 拈出現著者. 開坐于後爲白在果. 守令功勞及孝子烈女戰亡之人. 左道則臣所詳知. 右道則前年晉州之變. 列邑震蕩. 凡百文案. 幾盡散失. 又皆前監司 金誠一 金?時事. 臣無由得知. 追于收拾文書. 參以所聞. 馳達計料爲白臥乎事是良爾. 銓次以善達向敎是事. <177> 萬曆二十二年正月初十日. [孝子烈女秩] : 龍宮 一. 幼學鄭榮後同生妹及其妻韓氏. 倭賊焚 蕩時. 竝自投水死."(龍蛇雜錄 嘉善大夫止巡察使臣韓狀啓 孝烈抄錄)(www.history.go.kr 2005)


  쌍절각(雙節閣), 쌍절비(雙節碑), 예천우망리 쌍절각(醴泉憂忘里雙節閣), 비 [碑閣] : 풍양면 우망2리 334번지에 있는 목조와가 비각(木造瓦家碑閣)으로, 임진왜란(1592) 때의 동래인 매오 정영후(梅塢鄭榮後)의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 當時 24歲, 1569-1592)와 그 매씨(妹氏) 19세의 처녀 정씨(小姐鄭氏, 1574-1592)가 왜병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우망 북쪽 대동산(大同山)의 쌍절암(雙節岩)에서 몸을 던져 강의 쏘에 빠져 죽음으로써 정조를 지켰다. 뒤에 선조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그 수절을 기리기 위해 정려(旌閭)를 명하여 비각을 세우게 했다. 1619년(광해군 11)에 국가에서 세웠다. 비명(碑銘)에서 이르기를, "임진왜란에 한씨와 처녀 정씨가 집안 어른들을 따라 포내(浦內)의 북쪽 대동산으로 왜병을 피했었는데, 낙동강 섶으로는 벼랑을 깎아지른 듯하여, 높이가 수 10척이었다. 여기서 두 분이 서로 말하기를, "이 곳이 우리 두 사람이 불행을 벗어날 수 있는 곳이다."라고 하면서 적병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 곁에 엎드려 숨곤 했다. 하루는 한씨가 밤중에 잠을 깨어 일어나 일가 할머니에게 말하기를, "내 꿈에 한 여자가 나타나,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라고 하면서, 탄식하여 이르되, "이 지경에 이르러 무슨 좋은 일이 있으리오. 곱게 죽을 수 있는 곳이나 생긴다면 그것이 좋은 일일 것이다."라고 하더니, 며칠이 지나자(1592.5.2) 적병이 가까이 오자, 온 집안이 강을 건너 피난할 때 두 분이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마쳤다. 사람의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죽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런데 두 분이 능히 이 일을 이루었으니 맑고 밝은 기상과 티없이 아름다운 자질과 굳은 정절(貞節)의 큰 덕을 지니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이렇게 할 수 있었으랴. 온 집안이 예천 용문산(醴泉龍門山)으로 피난을 떠나면서 종 명춘(命春) 에게 두 분의 시신을 찾으라 하였다. 이 때 강 언덕을 따라 적병의 왕래가 잦으므로 명춘은 적병의 눈을 피해 시신을 찾았다. 처녀 정씨의 시신은 물에 빠진 곳으로부터 멀지 아니한 지점에서 발견되었고, 한씨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이 때 명춘이 적병에게 발각되어 붙잡혀가면서 마을 사람을 불러 이르되, "내가 7일 간이나 힘을 다해 두 분의 시신을 찾고자 했으나 한 분의 시신을 아직 찾지 못하고, 이제 내가 적병에게 잡혀서 죽는다."라고 하며, 드디어 적병에게 굴하지 아니하고 죽었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지자, 그 살던 마을 앞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했다. 1619년(광해군 11) 3월 대사성 정경세(大司成鄭經世)가 찬(撰)하고, 판관 조우인(判官曺友仁)이 썼다."라고 하였다.


  쌍절각(雙節閣) [碑閣] : 풍양면 우망리 여각거리에 있는 비각으로, 임진왜란 중 순절한 매오(梅塢) 정영후(鄭榮後)의 부인 청주 한씨와 그 시누이 동래 정소저(鄭小姐)를 기리기 위해 1619년(광해군 11)에 세웠다. 선조(宣祖)께서 쌍절이라 명정(命旌)했다. 비명(碑銘)은 1619년(광해군 11) 3월에 대사성인 정경세(鄭經世)가 짓고, 판관 조우인(曺友仁)이 글씨를 썼는데, 그 원문과 국역문이 <용궁향교지>(2005) 상권 1006-1011쪽에 수록되어 있다.


  쌍절각비(雙節閣碑) [碑] : 풍양면 우망리 326-2번지(垈) 쌍절각 내에 있는 비로, 비는 비좌(碑座)와 화관(花冠)이 있는 형태이다. 비신과 화관은 하나의 돌을 다듬어서 만들었는데, 비신 전면 상단에 ''''雙節閣''''이 새겨져 있다. 비신 뒷면에 ''''萬曆四十七年三月日立''''(1619)의 건비 연대가 새겨져 있다. 비좌의 높이는 25cm, 폭 92cm이고, 비신의 크기는 높이 152cm, 폭 64cm, 두께 15cm이다. 화관의 높이는 42cm, 폭 78cm, 두께 23cm이며, 자경(字徑)은 7x9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쌍절암(雙節岩), 말등바우 [바위] : 풍양면 우망리 우망(憂忘) 북쪽 대동산(大同山) 기슭, 낙동강 변 절벽에 있는 바위로, 말등(말똥)과 같이 생겼다. 이 바위 아래 쏘가 있는데, 임진왜란(1592) 때 매오 정영후(梅塢鄭榮後)의 부인 청주 한씨(당시 24세)와 그 누이동생 19세의 처녀가 왜병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쏘에 빠져 죽음으로써 정조를 지켰다. 뒤에 선조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이 바위를 쌍절암(雙節岩)이라 명명하고, "雙節岩" 3자를 음각하여 놓았다. 그러나 이 쌍절암에서 강물까지 뛰어 내리기는 거리가 멀어 불가능하기에 실제 자결한 바위는 그 아래 낙동강에 뛰어내릴 수 있는 바위라고 한다. 수절을 기리기 위해 정려를 명하여 우망2리 334번지에 쌍절각(雙節閣)을 세우게 했다.(醴泉郡誌 1939)


  쌍절암(雙節巖) [바위] : 풍양면 우망리 북쪽 낙동강 변에 있는 바위로, 임진왜란 때 매오(梅塢) 정영후(鄭榮後)의 부인 청주 한씨(24세)와 누이 정씨(19세)가 죽음으로 순결을 지키고자 강물에 몸을 던진 애절한 사연이 담긴 곳이고, 선조의 왕명으로 ''''雙節巖''''이라 새겼다.(龍宮鄕校誌 上卷 2005)


  예천우망리 쌍절각 비(醴泉憂忘里 雙節閣 碑) [碑] : 풍양면 우망리 326-2번지(垈) 쌍절각 내에 있는 비로, 비는 비좌(碑座)와 화관(花冠)이 있는 형태이다. 비신과 화관은 하나의 돌을 다듬어서 만들었는데, 비신 전면 상단에 ''''雙節閣''''이 새겨져 있다. 비신 뒷면에 ''''萬曆四十七年三月日立''''(1619)의 건비 연대가 새겨져 있다. 비좌의 높이는 25cm, 폭 92cm이고, 비신의 크기는 높이 152cm, 폭 64cm, 두께 15cm이다. 화관의 높이는 42cm, 폭 78cm, 두께 23cm이며, 자경(字徑)은 7x9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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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월포리 안동권씨정효각(安東權氏旌孝閣), 예천월포리 정효각(醴泉月浦里旌孝閣), 효부 권씨 정효각(孝婦權氏旌孝閣), 정효각 [碑閣] : 호명면 월포리 59번지 인포(仁浦) 우리개 큰마 중앙에 있는 목조와가 비각(木造瓦家碑閣)으로, 김해인 김복암(金福岩)의 아내 안동 권씨를 위하여 1870년(高宗 7)에 국가에서 세웠다. 권씨가 장님인 시어머니를 위하여 4년 동안을 기도를 드려 마침 시어머니의 눈을 뜨게 했기 때문이다. 권씨는 어릴 때부터 말이 적고 남과 다투기를 싫어하고 마음씨 곱고 기절이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가 김해 김씨 집안에 시집을 오니, 집안살림은 찌들게 가난하였다. 대가 관문(大家關門) 집은 고사하고 한끼두끼 굶주림에 놓여 있었다. 또한 눈병을 앓고 있던 시어머니가 실명(失明)까지 하였고, 남편은 품팔이를 하여 식량 한 두 되를 구해서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실명이 자신의 부덕(婦德)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하고 뒷담 밑에다 제단을 차려놓고 "일월성신 토지지신 팔금강 보살님(日月星辰土地之神八金剛菩薩님)! 그리고 하느님께 비나이다."라고 하면서 손발이 닳도록 불철주야(不撤晝夜)로 자신의 눈은 멀어도 좋으니 시어머니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더니 하늘도 무심치 않았던지 꽃 피고 잎 피는 춘삼월이 지나고 농촌의 계절인 5월의 어느 날, 정하수 동이를 단 위에 놓고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물동이 전에 서리가 서리어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이는 어떤 곡절이 있는 것이리라고 생각하며 이 서리를 수저로 접시에 담아 눈 먼 시어머님의 눈에 넣으니, 단번에 시어머님은 "보인다."라고 소리쳤다. 4년 간의 암흑에서 광명을 찾게 되었다. 그녀는 시어머님을 부축하면서 기뻐하여 춤을 추고 눈물을 흘려가며 울기 시작하니, 이웃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게 되었다. 찾아온 이웃 사람들에게 봉사할머니는 눈을 부릅뜨고, "저 사람이 누구야! 저것이 무엇이야!"라고 소리쳤다. 소문은 즉시 번져나가 들에 간 사람들에게도 이것이 알려지고 또한 김 효자에게도 알려졌다. 김 효자는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와 50년만 세상을 볼 수 있는 어머니와 아내를 붙들고 뜨거운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목격한 이웃들은 곧 예천향교와 예천군수에게 알리고 서리를 담았던 그 접시를 보내니 예천군수도 이 착한 덕을 위로 알리자고 경상도 관찰사에게까지 그의 효행을 보고하게 되었고, 경상도 관찰사 역시 크게 놀라 임금에게 고하는 추서(追書)를 다 쓰자, 접시에 담긴 서리는 물로 변하고 말았으니, 관찰사는 더욱 감탄하였다. 1867년(고종 4) 영남 어사 박선수(嶺南御史朴瑄壽)의 장계(狀啓)에 따라 고종께서 1870년(고종 7) 12월에 왕명으로 정려하였다. 비명(碑銘)은 "효부 김복암 처 안동 권씨지 려(孝婦金福岩妻安東權氏之閭)"이다.


  예천월포리 권효부 정려현판(醴泉月浦里 權孝婦 旌閭懸板) [彫刻] : 호명면 월포리 65-4번지(田)에 있는 정려비각 내에 유존하는 현판으로, ''''인포(仁浦)'''' ''''우리개 큰마'''' 중앙에 있다. 김해인 김복암(金福岩)의 아내 안동 권씨를 위하여 1870년(고종 7) 12월에 왕명으로 정려하였다. 비명은 ''''孝婦金福岩妻安東權氏之閭''''이다. 비석은 근년에 건비하였는데, 이수( 首)와 구부(龜趺)가 있는 형태이다. 이수의 높이 65cm, 귀부의 높이 52cm, 비신의 높이 160cm, 폭 57cm, 두께 27cm이다. 권효부 증려각기 현판은 원래 있던 것으로 가로 92cm, 세로 40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월포리 권효부 정려현판(醴泉月浦里 權孝婦 旌閭懸板) [彫刻] : 호명면 월포리 65-4번지(田)에 있는 정려비각 내에 유존하는 현판으로, ''''인포(仁浦)'''' ''''우리개 큰마'''' 중앙에 있다. 김해인 김복암(金福岩)의 아내 안동 권씨를 위하여 1870년(고종 7) 12월에 왕명으로 국가에서 정려하였다. 권씨가 장님인 시어머니를 위하여 4년 동안을 기도를 드려 마침 시어머니의 눈을 뜨게 했기 때문이다. 권씨는 어릴 때부터 말이 적고 남과 다투기를 싫어하고 마음씨 곱고 기절이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가 김해 김씨 집안에 시집을 오니, 집안 살림은 찌들게 가난하였다. 대가관문(大家關門) 집은 고사하고 한끼두끼 굶주림에 놓여 있었다. 또한 눈병을 앓고있던 시어머니가 실명까지 하였고, 남편은 품팔이를 하여 식량 한두 되를 구해서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실명이 자신이 부덕(婦德)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하고 뒷담 밑에다 제단을 차려놓고 "일월성신 토지지신 팔금강보살(日月星辰土地之神八金剛菩薩) 님! 그리고 하느님께 비나이다."라고 하면서 손발이 닳도록 불철주야로 자신의 눈은 멀어도 좋으니 시어머니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더니 하늘도 무심치 않았던지 농사의 계절인 5월에 정하수 항아리에 서리가 껴 그것을 접시에 담아 시어머니 눈에 넣었더니 시어머니의 눈이 떠쪘다. 이 일이 알려져 예천군수가 경상도 관찰사에게 그 효행을 보고하게 되었고, 경상도 관찰사 역시 크게 놀라 임금에게 고하는 추서를 다 쓰자, 접시에 담긴 서리가 물로변하였다고 한다. 1867년(고종 4) 영남 어사(嶺南御使) 박선수(朴瑄壽)의 장계(狀啓)에 따라 1870년(고종 7) 12월에 왕명으로 정려하였다. 비명은 ''''孝婦金福岩妻安東權氏之閭''''이다. 비석은 근년에 건비하였는데, 이수( 首)와 구부(龜趺)가 있는 형태이다. 이수의 높이 65cm, 귀부의 높이 52cm, 비신의 높이 160cm, 폭 57cm, 두께 27cm이다. 권효부 증려각기 현판은 원래 있던 것으로 가로 92cm, 세로 40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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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율곡리 열녀각(烈女閣) [터] : 하리면 율곡리(栗谷里) 작은밤실에 있던 비각으로, 삼척인 김영진(金永鎭)이 그의 증조모의 열행을 위하여 세웠으나, 1969년경에 헐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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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이사리 신계석효자비(辛癸錫孝子碑), 비 [碑] : 개포면 이사리에 있는 비로, 1992년 4월 8일(陰曆)에 이암공효행현창사업추진회(伊巖公孝行顯彰事業推進會, 회장 辛相薰)에서 세웠다. 비명은, "효자 이암 처사 영월 신공 계석지비(孝子伊巖處士寧越辛公癸錫之碑)"이다. 신계석(1884-1942)의 자는 성우(聲禹), 호는 이암(伊巖), 성기(聖基)의 아들이다. 천성이 단학(端確)하고 지개(志槪)가 굳었다. 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뒤이어 형도 잃고 살림마저 가난하되, 선례후학(先禮後學)하여 어머님을 지성으로 봉양하더니, 1925년 섣달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무덤 곁에 움집을 짓고 3년을 시묘했다. 무덤이 공동묘지이므로 으슥하고 인적도 없어 밤이면 귀신의 유혹이 들끓고, 사나운 짐승들이 날뛰어 음산하되 자약(自若)하였다. 그는 몸소 영농(營農)하는 처지여서 낮에는 농사에 골몰하고 밤이면 묘 옆에 기거(寄居)하되 구덩이를 파고 띠를 엮어서 겨우 비바람을 가리었다. 캄캄한 밤에는 귀신의 소리가 들리고 맹수(猛獸)가 나타났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눈보라의 겨울에도 두터운 옷을 입지 않고 이불로 봉토(封土)을 덮었다. 두발(頭髮)에 빗질도 하지 않고 의복을 갈아 입지도 않았다. 음주(飮酒)를 삼가하고 남과 얘기를 피하였다. 이상하게도 부엉이가 함께 지키다가 상기(喪期)가 끝나, 그가 집으로 오자 따라와 뜰안의 나무에 머물다가 선사(禪祀)가 지나서야 떠났다. 1993년 12월 30일에 추진회에서 <이암 신공 효행 추모록(伊巖辛公 孝行追慕錄)>(181쪽)을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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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작곡리 남영필효자비(南永弼 孝子碑) [碑] : 보문면 작곡리 산75번지(林)에 있는 비로, 단각 건물의 정려각 안에 있다. 비는 비신(碑身)과 장방형의 비좌(碑座)가 있는 형태로, 비신은 월두형(月頭形)이다. 비신의 전면에는 ''''孝子南永弼之碑''''가 각자(刻字)되어 있다. 비좌의 높이는 15cm, 너비는 79cm이고, 비신 높이는 116cm, 너비 37cm, 두께 16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남영필 정효각(南永弼旌孝閣), 예천작곡리 정효각(醴泉鵲谷里旌孝閣), 정효각(旌孝閣), 비(碑) [碑閣] : 보문면 작곡2리 536번지 하읍실(下邑室) 솔티마을 앞 동구(洞口) 오래 묵은 느티나무 아래에 있는 목조와가 비각(木造瓦家碑閣)으로, 가로 2m, 세로 2m, 건평 4평이다. 철종 때의 영양인 남영필 효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19년에 그의 아들 재학(在鶴)이 세웠다.


  예천작곡리 남영필 효자비(醴泉鵲谷里 南永弼 孝子碑) [碑] : 보문면 작곡리 산75번지(林)에 있는 비로, 단각 건물의 정여각 안에 있다. 비는 비신(碑身)과 장방형의 비좌(碑座)가 있는 형태로, 비신은 월두형(月頭形)이다. 비신의 전면에는 ''''孝子南永弼之碑''''가 각자(刻字)되어 있다. 비좌의 높이는 15cm, 너비는 79cm이고, 비신 높이는 116cm, 너비 37cm, 두께 16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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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장송리 강릉김씨효열각(江陵金氏孝烈閣), 비(碑) [旌閭閣] : 개포면 장송리(長松里) 성조마을 뒤, 성선산 하록(下麓)에 있는 효열부 감릉 김씨의 비각으로, 1987년 3월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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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제곡리 예천권씨정려각(醴泉權氏旌閭閣), 비(碑) [碑閣] : 용문면 제곡리에 있는 비각으로, 동제사(洞祭祀)를 올리는 성황당 근처에 있었다. 몇 년 전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훼철되어 유지(遺址)가 있다. 열부 예천 권씨(烈婦醴泉權氏)의 것인데, 그녀는 권기언(權箕彦)의 아내로 열행(烈行)을 남겼다.


  예천제곡리 정열각(醴泉渚谷里旌烈閣), 비(碑) [碑] : 용문면 제곡리에 있는 비각으로, 권기언(權箕彦)의 아내 권씨(權氏)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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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359


  용궁향교(龍宮鄕校 春季 釋奠大祭 奉行) [記事] : 용궁향교(전교 안종건)는 2005년 3월 4일 오전 10시 대성전에서 김수남 군수, 유관 기관단체장, 유림, 학생 등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춘계 석전대제를 봉행했다. 용궁향교에서는 공문 5성위를 비롯한 송 4현 및 국내 18현 등 27위를 봉향하고 있으며, 매년 전통 방법에 의해 대제를 지내고 있다. 이 날 석전대제는 전종흠 씨가 집례, 김수남 군수 초헌관, 권병관 씨가 아헌관, 이종태 씨가 종헌관, 정재학 안상대 이준상 씨가 분헌관, 대축은 정필수 씨가 담당했다. 한편 이 날 김수남 군수가 감사패, 이세호 전 전교가 공로패, 권병관 이종태 씨가 성균관장 표창을 받았다.(醴泉新聞 2005-03-19 10:4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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