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제목금당실 하금 소개(하금곡리, 하금곡동)
작성자관리자 @ 2005.11.05 08:39:59

 

하금곡리

15세기 전반에 醴泉人 權幼孫(?∼1456 監察)이 성현리 중리 휴구곡에서 오룡곡으로 옮겨 살았다. 금당실로 개칭되었으나 그 아래쪽이 되므로 아릇 금당실, 또는 하금곡동이라 하였다. 16세기 전반에 慶州人 李 節(1491∼1578)이 외숙인 權五紀에게 글을 배우면서, 이웃한 곳에 마을을 개척하여 버들밭이라 하였다. 또 예천 권씨가 世居하던 아랫 금당실은 1869년에 함양 박씨 烈婦閣을 주막거리에서 마을 안으로 이전하고 부터는 여각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래 예천군 제곡면 하금곡동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페합에 따라 용문면 하금곡동이라 하였고, 행정상 1동은 여각, 용두, 안마, 남짝, 웃마, 새마이고, 2동은 버들밭과 인산으로 나누었다. 1988년에 하금곡리로 개칭되었다.


성현리의 병암정

 여각마(閭閣)

하금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醴泉人 權國柱의 아내 咸陽朴氏의 열부각이 마을 앞에 있다. 예천권씨의 집성촌이며, 마을안에 있는 곳을 특히 안마라고 한다.


여각마 (안마)_

용두(龍頭, 용머리, 거북대가리)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지형에서 나온 이름이다. 또 주민이 살고 있는 쪽의 지형이 거북머리모양이라 해서 거북대가리라고도 한다.


하금1리 용두

 버들밭(柳田, 큰마)

여각 서쪽 들에 있는 마을로 李 節이 개척할 때 마을앞에 버드나무 밭이 있어 버드나무 가지에 꾀꼬리가 둥지를 튼 유지앵소(柳枝鶯巢) 형국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이 컸던 省吾堂 李介立의 장자가 이마을에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하금2리 큰마

인산(仁山 개금재, 계금자, 게금재)

여각 북쪽에 있는 마을로 게금(개암)이 많이 있었으며 또한 인산서원이 있었다. 藥圃 鄭琢(1529∼1605 右議政)이 이곳에서 태어날 때 용문사 뒷 산에서부터 서광이 이곳으로 비치었다 한다.

 
 
하금2리 게금재

정탁(鄭琢1526∼1605)

본관은 청주, 휘는 탁(琢), 자는 자정(子精)이니 시는 정간(貞簡), 약포(藥圃)는 자호이다. 1558년(명종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89년 우찬성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에 호종했고, 1594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1600년 좌의정으로 등용되어 1603년 영중추부사가 되고, 다음해 호종공신 3등으로 서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봉조하에 이르렀다. 박학다식하여 경서를 비롯, 천문·지리·병법 등에 까지도 정통했다. 그는 나중에 곽재우(郭再祐)·이순신(李舜臣)·김덕령(金德齡) 등 명장을 발탁하여 국난을 구하게 했고, 특히 이순신이 누명을 쓰고 옥살이할 때 이를 구출한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예천의 도정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약포집(藥圃集) 용만견문록(龍灣見聞錄)이 있다.

인산서원터(仁山書院址)

인산 동북쪽에 있는 인산서원의 터인데 權五紀, 李光胤을 배향했는데, 1868년(高宗5)에 헐렸다.

급월정(汲月井)

버들밭 앞에 있는 우물로 16세기 후반에 성오당 이개립(1544∼1625)이 팠는데 전 동민이 사용하기에 넉넉지 못하여 달밤에도 물을 길러야 했기에 이 우물을 급월정이라 하였다.

다신바우터

버들밭 근처 국도옆에 있던 바위의 터인데 1980년대 도로 포장공사를 할 때 포크레인으로 밀었다. 그후 용문사 화재(1984) 등 용문면에 큰 재앙이 잇다라 발생하자 "대통령 명령"이라고 써 붙이고 제사를 지낸 이후는 재앙이 없다.


용문입구 (다신 바우터)

 

출처 : 용문초등학교 총동창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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