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제목방외지사의멋
눈이 많이도 내렸다. 무릉계곡은 흐르는 물이 그대로 얼어붙어 시간까지도 정지시켜 버린듯하다. 어귀의 금란정 누각에는 길손마저도 내리는 눈을 피하지 않았는지 발자국 조차없이 텅 비어있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화강암 다리 저편 골짜기 절에는 다행이도 처마 위로 기와를 올리는 일꾼들의 모닥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황토온돌방에 놓여있는 투박하면서도 기품있는 차상 앞에 물끓는 소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 고려말엽 송광사에 머물고 있던 전각혜심선사는 참으로 멋을 아는 차인이기도 했다. 오늘 같이 눈이 가득 내린 날 인적마저 완전히 끊어진 암자에서 화로에 불을 붙이고 소반 가득히 눈을 담아와 그 녹인 물로 차를 끊였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시는 차 한잔에 세속 바깥의 멋을 혼자서 음미하곤 했다. 그야말로 방외지사의 모습 그자체였다.
2 어느 노스님은 지금도 거의 차를 드시지 않는다. 젊을 때부터 그랬다고 한다.
다반사라고 했는데 어째서? 언제가 궁금해서 그까닭을 여쭌 적이 있다.
"예전에 수행한다고 한참 애를 쓰고 있던 시절, 또래나이의 도반들이 툇마루에 앉아서 공부는 뒷전이고 차나 마시면서 잡담하고 있는게 너무 보기싫어서 그랬지."
하루는 우리끼리 차를 마시고 있는데 심심하셨는지 가까이 다가와 옆에 앉으시는 것이아닌가? 그래서 차를 한잔 올렸다.그날은 드셨다.그리고는 이어 한마디 하신다.
"근데 요즈음은 잠이 안와서 더는 못먹어."
3 젊은 학인제자 ㅇㄹ백여명과 함께 지내는 어느 칼칼한 강사스님은 경전 연구하는 시간을 빼앗기는게 싫어 아예 차상을 치워버렸다. 심지어 어여쁜 제자들 간식거리를 잔뜩 가져다준후원자들까지 맨입으로 돌려 보냈더니 어느 날 부터 대중들 먹거리 마저 팍팍해졌다.
할 수없이 지금은 일본 유학시절 익힌 말차솜씨를 한껏 발휘하여 성의를 다해 손목이 아프도록 거품을 내어 다려주신다고 한다. 그 차 마시려 일부러 나도 몇 번들렀다.
섣달에 내린 눈을 녹인 물을 납설수라고 부른다. 눈을 녹여 차를 끊여마시는 그런 낭만은 이제 이 강원도 첩첩 골짜기라고 해도 공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어려울 것같다. 제대로 끊이지 못한 물을 맹탕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사람도 설익은 놈을 맹탕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번뇌란 근본적으로 뜨겁다.출세나 명예 그리고 부를 향해 치달리는 세간은 늘 마음이 들끊기 마련이다. 그 뜨거운 번뇌를 한잔 뜨거운 차로 잠시 식힐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차를 제대로 마시고자 하는 이는 좋은 물과 차를 얻고자 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그것도 또 하나의 번뇌이긴 하지만. 하지만 번뇌로 번뇌를 제거한다고나 할까. 덧붙여 차의 나뭇가지는 가늘고 작다고 할지라도 열매가 맺힌다고 하는의미인 '명가유실리'는 설사 외형은 허술할지라도 그 내면은 충실해야만 하는 이즈음 세태에 가장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명언으론 제격이라 할 것이다.
- ---- 원철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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