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제목반유(潘濡, 시묘살이 풍습을 정립한 조선 초의 절의 선생)
작성자관리자 @ 2004.09.22 22:42:50
반유(1374-1437)는 용문면 상금곡리 출신으로, 본관은 거제, 용귀(湧貴)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시자(1415), 묘소 앞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무덤 앞에 엎드려 슬피 눈물을 흘리면서 절대로 웃지를 않았다.

돌아가신 부모를 섬기는데, 그 정성을 다하는 것은 살아계신 부모를 섬기기보다도 더 어렵기 때문에 맹자께서도 이르시기를, "산 이 섬기기는 오히려 큰 일이 아니지만, 죽은 이 보내는 것이 오로지 큰 일이다."라고 하였다.

반유가 살던 시대는 고려의 예절이 무너지고, 조선의 새로운 예절이 정립되지 않던 시대였다. 이 때 반유가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눈물을 흘리며 남에게 이빨을 보여 웃지를 않고 시묘살이를 했으니, 이는 조선의 풍습을 정립시키고 바로잡은 시초가 되었던 것이다.

반유가 과거 시험을 포기한 것도 반유가 살던 시대인 고려 말기가 혼탁하였고, 새로운 세상인 조선에서 벼슬함을 부끄러워하였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반유의 절의와 효행이 뛰어나, '절효(節孝)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일이 경상도 관찰사에 의해 조정에 알려져 태종 임금께서 정려하여 정문(旌門, 1418)을 내렸고, 성종 임금은 오원도 찰방(烏原道察訪)에 증직(1477)하였다. 정려된 효자각이 보문면 고평리 가시내에 있었으나 홍수로 인하여 보문면 신월리 독제이(讀亭)로 옮겨 세웠다가 다시 고평2리 안골로 옮겨 세웠다(1976).

무덤은 예천읍 용산리 용사이 뒷산에 있는데, 묘비(1867)가 세워졌고, 숙종 때 보문면의 옥천(玉川)서원과 용궁면 덕계리의 충효사우(忠孝祠宇)와 달계(達溪)서원에 제향되었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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