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제목인물26) 박수서(朴守緖, 권세가에게 저항한 병조참의)
박수서(1567-1627)는 용문면 상금곡리 출신으로, 자는 경승(景承), 호는 우계(尤溪), 본관은 함양, 지(芝)의 5자이다.
1588년(선조 21)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성리학에 박학하다고 하여 천거되어 건원릉(健元陵) 참봉에 임명되었다. 그 후 평안도 도사로 있으면서 과거 시험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1609년(광해군 1)에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에 임명되었다. 그 후 문무 어사를 거쳐 승지로 승진하고, 벼슬이 정3품 병조 참의(兵曹參議)에까지 이르렀다.
광해군의 명령으로 순무어사로서 평안도 의주로 갔을 때, 그 곳 사람들이 당시의 권세가였던 이이첨의 성리학을 칭송하는 기념비를 세우자, 박수서가 이를 보고 화를 내며 이르기를, "한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은 속일 수 없으며, 당대는 속일 수 있지만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그 비석을 부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박수서는 이이첨의 분노를 사게 되었으나, 박수서의 학문과 인품이 워낙 고매하므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개포면 경진리 사람 조우인이 인목대비의 서궁유폐사건을 보고 분개하여 탄식한 시(1621)를 지었는데, 이이첨이 이를 광해군을 욕한 역적의 뜻이 있다고 무고를 하여, 조우인을 감옥에 가둔 이른 바 서궁시옥(西宮時獄)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박수서도 조우인과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서로 친하다고 하여 감옥에 들어가 3년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1623)이 일어나자 맨 먼저 풀려나 울산 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정묘호란(1627) 때 인조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 갔다가 그 곳에서 타계하였다. 무덤은 용문면 원류리 허리골에 있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1588년(선조 21)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성리학에 박학하다고 하여 천거되어 건원릉(健元陵) 참봉에 임명되었다. 그 후 평안도 도사로 있으면서 과거 시험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1609년(광해군 1)에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에 임명되었다. 그 후 문무 어사를 거쳐 승지로 승진하고, 벼슬이 정3품 병조 참의(兵曹參議)에까지 이르렀다.
광해군의 명령으로 순무어사로서 평안도 의주로 갔을 때, 그 곳 사람들이 당시의 권세가였던 이이첨의 성리학을 칭송하는 기념비를 세우자, 박수서가 이를 보고 화를 내며 이르기를, "한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은 속일 수 없으며, 당대는 속일 수 있지만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그 비석을 부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박수서는 이이첨의 분노를 사게 되었으나, 박수서의 학문과 인품이 워낙 고매하므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개포면 경진리 사람 조우인이 인목대비의 서궁유폐사건을 보고 분개하여 탄식한 시(1621)를 지었는데, 이이첨이 이를 광해군을 욕한 역적의 뜻이 있다고 무고를 하여, 조우인을 감옥에 가둔 이른 바 서궁시옥(西宮時獄)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박수서도 조우인과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서로 친하다고 하여 감옥에 들어가 3년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1623)이 일어나자 맨 먼저 풀려나 울산 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정묘호란(1627) 때 인조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 갔다가 그 곳에서 타계하였다. 무덤은 용문면 원류리 허리골에 있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