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제목인물 24) 이영문(李榮門, 임란 때 창의한 학자)
이영문(1548-1618)은 용문면 하금곡리 버들밭(柳田) 출신으로, 자는 인백(仁伯), 호는 동거(東渠), 본관은 경주, 창효(昌孝)의 맏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조부 이절(李節)에게서 글을 열심히 배워서 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향시(鄕試)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두 번이나 의거한 사실이 망우당 곽재우 <응모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영문은 풍채가 학처럼 우뚝하고 늘씬하였다. 효행과 우애가 두터웠고, 할아버지가 특히 이영문을 사랑하여 토지를 더 많이 나누어 주려하자, 이영문은 눈물을 흘리면서 굳이 사양하였다.
이영문은 남을 헐뜯지 않았고, 구차스럽게 남과 야합할 줄도 몰랐다. 공적인 일로 당시 예천군수 이춘영(李春英, 1600-1601)을 자주 만난 일은 있었지만 사적인 일로는 한 번도 군청을 찾아가지 않았다. 더욱이 늙어서는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서, 더욱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하금곡리 버들밭에 살면서, 이개립, 이광윤, 정윤목 등과 더불어 사로회(四老會)를 조직하여 성리학을 함께 연구하며 사이좋게 사귀었다.
늘 좋은 일이 있을 때나 명절 때는 서로 만나 즐겼다. 정성과 존경을 생활 신조로 삼아서 생활하였기에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그리하여 정승 정언신(鄭彦信)이 이영문의 어진 것을 알고 벼슬하도록 권유하여 참봉에 천거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영문이 벼슬에 천거된 이유는, 시를 잘 지었고, 예절 바름이 모범적이고, 도덕을 실천하는 참된 선비였기 때문이다.
끝끝내 세상의 영예를 탐하지 않고, 고향에서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타계하였다. 무덤은 보문면 오암리 문암(門岩)의 남산에 있고, 효행으로 호조 좌랑에 증직되었고, 문집이 있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이영문은 풍채가 학처럼 우뚝하고 늘씬하였다. 효행과 우애가 두터웠고, 할아버지가 특히 이영문을 사랑하여 토지를 더 많이 나누어 주려하자, 이영문은 눈물을 흘리면서 굳이 사양하였다.
이영문은 남을 헐뜯지 않았고, 구차스럽게 남과 야합할 줄도 몰랐다. 공적인 일로 당시 예천군수 이춘영(李春英, 1600-1601)을 자주 만난 일은 있었지만 사적인 일로는 한 번도 군청을 찾아가지 않았다. 더욱이 늙어서는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서, 더욱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하금곡리 버들밭에 살면서, 이개립, 이광윤, 정윤목 등과 더불어 사로회(四老會)를 조직하여 성리학을 함께 연구하며 사이좋게 사귀었다.
늘 좋은 일이 있을 때나 명절 때는 서로 만나 즐겼다. 정성과 존경을 생활 신조로 삼아서 생활하였기에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그리하여 정승 정언신(鄭彦信)이 이영문의 어진 것을 알고 벼슬하도록 권유하여 참봉에 천거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영문이 벼슬에 천거된 이유는, 시를 잘 지었고, 예절 바름이 모범적이고, 도덕을 실천하는 참된 선비였기 때문이다.
끝끝내 세상의 영예를 탐하지 않고, 고향에서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타계하였다. 무덤은 보문면 오암리 문암(門岩)의 남산에 있고, 효행으로 호조 좌랑에 증직되었고, 문집이 있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