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제목인물 23) 권장(權檣, 학문에 해박한 호조 정랑)
작성자관리자 @ 2004.09.06 21:05:19
권장(1489-1529)은 용문면 하학리 텃골 사람으로, 자는 제보(濟甫), 호는 제촌(霽村), 본관은 안동, 사빈(士彬)의 셋째 아들이다. 1513년(중종 8)에 진사가 되고, 1519년(중종 14)에 현량(賢良)으로 벼슬에 추천되었으나,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같은 해 6월에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다.

기묘사화(1519.11)가 일어나자, 왕에게 아뢰기를,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이미 체포되었으니, 저도 감옥으로 가서 동료들과 함께 벌을 받게 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당인 훈구파는 또다시 권장이 조광조의 무리인 사림파라고 하여 처벌하기를 집요하게 주장(1519.12.15)하였다. 그러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예문관 검열, 홍문관 박사 등을 역임하고, 사헌부 감찰(1520)에 올라서 임금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경상좌도 점마별감(點馬別監, 1520.12)으로 민정을 살피기도 하였다.

그러나 훈구파들의 끈질긴 반격을 받아 진보 현감(1522)으로 좌천되었다. 그 후 성균관 직강이 되고, 이어서 형조, 공조, 호조의 정랑이 되었다. 다시 남상북문(南床北門)의 화(禍)가 일어나자, 금산(現 金泉) 군수(1529)로 좌천이 되어서 부임하기 전에 타계하였다. 무덤은 예천읍 갈구리 구미산(龜尾山)에 있고, 예천군 다인현(現 義城)의 봉산(鳳山)서원에 제향되었고, 부제학에 증직되었다.

<대동야승>에서는 이르기를, "권장은 뜻이 소박하고 자질이 순후하여 꾸밈을 일삼지 않으며, 학문이 해박하고 효제(孝悌)와 지조가 있다. 사화가 있은 뒤에 박사로 승진하였으나 물리침을 당해 용궁 현감이 되었고, 술을 한껏 마시다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마을소식

마을이야기 [1137쪽]페이지의  홈페이지URL 정보를 담고 있는 QR Code 입니다. 홈페이지 주소는 https://ycg.kr/open.content/geumdangsil/news/talk/?i=124190&p=1137 입니다.

이 QR Code는 현재 보시는 <마을이야기 [1137쪽]페이지>의 홈페이지URL 정보를 담고 있는 QR Code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