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제목박태원(朴泰元,3.1운동때 용문서 만세부른 독립운동가
박태원(1885-1924)은 용문면 상금곡리 동촌(東村) 마을 출신으로, 자는 성중(聖中), 본관은 함양, 정진(正鎭)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활발하고 재능이 뛰어나 일찌기 학문을 좋아했고, 유학에 조예가 깊어 선비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한일합방(1910)이 체결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한 박태원은 용문면 내의 동지들과 국가의 운명을 한탄하는 한편, 민족 의식을 고취하면서 지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3.1운동(1919)이 요원의 불꽃처럼 전국으로 번지게 되자, 박태원은 이에 호응하여 조국의 독립을 투쟁하여 얻기로 결심하고, 용문면 내의 권석인, 김형식, 박규수, 변용구 등과 태극기를 손수 만들고, 또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나자는 선전문을 만들어 용문면 내의 각 동리에 나누어주고, 약속 날인 1919년 4월 2일을 기하여 용문면사무소 앞에 모여든 300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니, 그 만세 소리는 산과 들을 진동시켰다.
그러나 이튿날 충돌한 일본 경찰들에게 박태원은 주모자로 여러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갖은 고문과 형벌을 당하다가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하였다. 그러나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병의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1924년 3월 13일 타계하니, 그 때의 나이 39세의 젊은 나이였다.
무덤은 용문면 원류리 허리골(希夷谷)에 있는데, 문화공보부에서 문화 유적으로 등록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선 박태원의 얼은 조국을 빛낼 수 있는 긍지높은 신한국 창조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한일합방(1910)이 체결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한 박태원은 용문면 내의 동지들과 국가의 운명을 한탄하는 한편, 민족 의식을 고취하면서 지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3.1운동(1919)이 요원의 불꽃처럼 전국으로 번지게 되자, 박태원은 이에 호응하여 조국의 독립을 투쟁하여 얻기로 결심하고, 용문면 내의 권석인, 김형식, 박규수, 변용구 등과 태극기를 손수 만들고, 또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나자는 선전문을 만들어 용문면 내의 각 동리에 나누어주고, 약속 날인 1919년 4월 2일을 기하여 용문면사무소 앞에 모여든 300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니, 그 만세 소리는 산과 들을 진동시켰다.
그러나 이튿날 충돌한 일본 경찰들에게 박태원은 주모자로 여러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갖은 고문과 형벌을 당하다가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하였다. 그러나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병의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1924년 3월 13일 타계하니, 그 때의 나이 39세의 젊은 나이였다.
무덤은 용문면 원류리 허리골(希夷谷)에 있는데, 문화공보부에서 문화 유적으로 등록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선 박태원의 얼은 조국을 빛낼 수 있는 긍지높은 신한국 창조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