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제목⑮김주(병자호란 때 척화상소를 올린 충청도 도사)
작성자관리자 @ 2004.08.11 20:51:01
김주(1606-1681)는 용문면 구계리 출신으로, 자는 여정(汝定), 호는 불구당(不求堂), 본관은 의성, 만흠(萬欽)의 현손이다. 1633년(인조 11) 가을에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이 때 홍익한 등 35명과 함께 동도회(同道會)를 조직하였다.

병자호란(1636)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피란한 인조 임금을 모시려고 달려갔으나 성문이 닫혀 들어가지 못하고 울며 고향 예천으로 돌아왔다.

그 후 호명면 내신리 신당 사람 이래(李崍) 등과 의병을 이끌고(1637.1), 남한산성으로 다시 갔으나, 이미 인조가 항복한 뒤여서 귀향하였다가, 성균관 장의(掌議)로서 척화(斥和) 상소(1638)를 올렸다.

1639년(인조 17) 식년 문과에 상금곡리 사람 박정시와 함께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가 되었는데, 청 나라 앞잡이로서 통역관인 정명수가 척화파를 찾아내자(1640), 김상헌과 함께 청 나라로 잡혀가던 도중, 대신들의 반대로 풀려났다.

그러나 청 나라를 치자는 글을 짓고 벼슬에서 물러나서 세상 사람들이 김주를 '숭정처사(崇禎處士)'라 불렀다.

그 후 무장 현감(1648)으로 나가 현청을 자기 봉급으로 고쳐지어, 효종 임금이,"부임한 지 2년만에 가장 잘 다스리는 고을이 되었다"라고 칭찬하면서 표창(1650)하였고, 선정비(1651)를 세웠다.

그 후 연안 현감(1652), 양산 군수(1655), 함평 군수(1670), 충청도 도사 등의 벼슬을 거치면서 백성을 잘 다스려 정3품 통정대부(1671)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1672)에 올랐다.

벼슬을 그만 두고(1673) 귀향하여 70세가 넘은 고령으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안간힘을 다하다가 타계하였는데, 그 후 예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김주는 성격이 강직하고 의로워서 덕행이 뛰어났고, 문장을 잘 지어 유고와 예천 무학당(武學堂) 중수기를 남겼다.

김주가 성균관에서 조직했던 동도회는 지금껏 그 후손들이 유지시키고 있다. 척화 상소를 올리고 청 나라를 물리치자는 글을 짓고 벼슬에서 물러난 김주의 절의와 기개를 세상 사람들은 김상헌의 그것과 맞먹는다고 했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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