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제목인물14권오복(權五福, 무오사화에 희생된 홍문관교리)
권오복(1467-1498)은 용문면 하금곡리 출신으로, 자는 향지(嚮之), 호는 수헌(睡軒), 본관은 예천, 선(善)의 셋째 아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다. 매우 열심히 공부하여 1486년(성종 17) 형 오행, 오기와 함께 생원이 되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뽑혀 등용되었다가, 승진하여 홍문관 교리 벼슬에 있을 때에 글을 매우 잘 지었으므로 임금의 사랑을 받아 한림으로 뽑혀 호당(湖堂, 1492)에 들어가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나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 예천 가까이로 가기를 자원하여 영덕 현령(1495.6.29)을 제수받았다. 영덕의 골원이 된 지 3년만에 서울로 체포 압송되어 갔다.
옛날 중앙에 있을 때 사관(史官)으로서 사초(史草)에 스승 김종직의 이력서를 적어 넣었다 하여 반대당 훈구파로 인해 이른 바 무오사화를 만나 32세의 젊은 나이로 시형을 당했다. 형틀 앞에서도 굳게 버티고 어지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과연 권오복의 의기와 절개는 매우 굳세었다.
그 후 1504년(연산군 10) 3월 4일에 권오복의 두 딸은 용서를 받았고, 중종 때 몰수된 재산을 되찾았고(1507),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예천읍 서본리의 향사우(鄕祠宇)와 예천 다인(現 義城)의 봉산(鳳山)서원에 제향되었다.
권오복은 글씨와 시에 뛰어나고, 문장이 굳세고 힘차고 맑아서 당시 선비들의 칭찬을 받았다. 저서로 <수헌집(睡軒集)>, <수헌시집(睡軒詩集)>이 있는데, 구절 하나하나에 마음의 깊은 속에서 흘러나온 충효의 정신이 엉켜 있다. 또한 권오복의 시문이 <동문선(東文選)>, <대동시림(大東詩林)>등에 많이 실려있다.
권오복이 1495년(연산군 1) 3월 11일에 왕께 아뢰어, 상(喪) 중에 좋은 옷을 입고서 중국 황제의 문서를 받을 수 있도록 예절을 고쳤으며, 같은 해 6월 26일에는 불경 출판을 반대하고 성리학 정치를 왕에게 아뢰었고, 29일에는 사간원 관리의 구속에 항의하기도 하였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그러나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 예천 가까이로 가기를 자원하여 영덕 현령(1495.6.29)을 제수받았다. 영덕의 골원이 된 지 3년만에 서울로 체포 압송되어 갔다.
옛날 중앙에 있을 때 사관(史官)으로서 사초(史草)에 스승 김종직의 이력서를 적어 넣었다 하여 반대당 훈구파로 인해 이른 바 무오사화를 만나 32세의 젊은 나이로 시형을 당했다. 형틀 앞에서도 굳게 버티고 어지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과연 권오복의 의기와 절개는 매우 굳세었다.
그 후 1504년(연산군 10) 3월 4일에 권오복의 두 딸은 용서를 받았고, 중종 때 몰수된 재산을 되찾았고(1507),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예천읍 서본리의 향사우(鄕祠宇)와 예천 다인(現 義城)의 봉산(鳳山)서원에 제향되었다.
권오복은 글씨와 시에 뛰어나고, 문장이 굳세고 힘차고 맑아서 당시 선비들의 칭찬을 받았다. 저서로 <수헌집(睡軒集)>, <수헌시집(睡軒詩集)>이 있는데, 구절 하나하나에 마음의 깊은 속에서 흘러나온 충효의 정신이 엉켜 있다. 또한 권오복의 시문이 <동문선(東文選)>, <대동시림(大東詩林)>등에 많이 실려있다.
권오복이 1495년(연산군 1) 3월 11일에 왕께 아뢰어, 상(喪) 중에 좋은 옷을 입고서 중국 황제의 문서를 받을 수 있도록 예절을 고쳤으며, 같은 해 6월 26일에는 불경 출판을 반대하고 성리학 정치를 왕에게 아뢰었고, 29일에는 사간원 관리의 구속에 항의하기도 하였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