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제목김빈(金賓, 자비, 치밀, 청렴, 분별로 다스린 국방부차관)
김빈(1621-1694)은 용문면 죽림리 남악골(南嶽洞) 출신으로, 상금곡리로 옮겨 살았다. 자는 빈여(賓如), 호는 갈천(葛川), 본관은 의성, 시진(侍振)의 아들이다.
1651년(효종 2)에 진사가 되고, 1657년(효종 8)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예조 좌랑 등의 벼슬을 하였다.
문경 현감으로 있을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려고 안간힘을 써서 1671년(현종 12)의 큰 가뭄에도 굶주린 백성이 없었다. 그리하여 문경을 떠날 때는 많은 문경 사람들이 환송하며 슬퍼하였고, 선정비를 세워주기도 하였다.
그 후 요즈음 국방부 차관에 해당되는 종2품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거쳐, 승정원 도승지 등 내외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여러 차례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임금께 청했으나, 김빈의 인품을 아낀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겸손하고 부지런한 학자일 뿐 아니라, 벼슬에 있으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항상 칭찬을 받았고, 남의 헛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또한 벼슬에 욕심을 내지 않고 모든 일을 정성을 다하여 소신대로 처리하였기 때문에 왕이 매우 아끼었다.
더욱이 당시는 당파 싸움이 심한 때였지만, 김빈은 이르기를, "반대편이 반드시 소인이 아닐 것이고, 이 쪽이 다 군자는 아닐 것이니, 나의 소신대로 정확히 일을 처리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요직에 있을 때는 언제나 오만하지 않았고 항상 겸손하였으며, 벼슬에 있을 때는 가는 곳마다 백성을 위하여 정치를 잘 한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관청의 문을 항상 열어 놓고 누구나 어려운 일을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해결하여 주었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기에 모든 힘을 쏟았다.
1651년(효종 2)에 진사가 되고, 1657년(효종 8)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예조 좌랑 등의 벼슬을 하였다.
문경 현감으로 있을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려고 안간힘을 써서 1671년(현종 12)의 큰 가뭄에도 굶주린 백성이 없었다. 그리하여 문경을 떠날 때는 많은 문경 사람들이 환송하며 슬퍼하였고, 선정비를 세워주기도 하였다.
그 후 요즈음 국방부 차관에 해당되는 종2품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거쳐, 승정원 도승지 등 내외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여러 차례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임금께 청했으나, 김빈의 인품을 아낀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겸손하고 부지런한 학자일 뿐 아니라, 벼슬에 있으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항상 칭찬을 받았고, 남의 헛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또한 벼슬에 욕심을 내지 않고 모든 일을 정성을 다하여 소신대로 처리하였기 때문에 왕이 매우 아끼었다.
더욱이 당시는 당파 싸움이 심한 때였지만, 김빈은 이르기를, "반대편이 반드시 소인이 아닐 것이고, 이 쪽이 다 군자는 아닐 것이니, 나의 소신대로 정확히 일을 처리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요직에 있을 때는 언제나 오만하지 않았고 항상 겸손하였으며, 벼슬에 있을 때는 가는 곳마다 백성을 위하여 정치를 잘 한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관청의 문을 항상 열어 놓고 누구나 어려운 일을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해결하여 주었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기에 모든 힘을 쏟았다.
김빈은 자비, 치밀, 청렴, 분별을 스스로를 다스리는 원리로 삼았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