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제목이광윤(李光胤,임란때 예천에서 의병을 일으킨우통례)
작성자관리자 @ 2004.08.02 20:07:07
이광윤(1564-1637)은 용문면 하금곡리 사람으로,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 西), 본관은 경주, 잠(潛)의 둘째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임진왜란(1592) 때는 하금곡리의 이개립, 제곡리의 권욱과 더불어 예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신이 되었다.

그 공으로 소촌도 찰방(1594)을 제수받고 비안 현감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내외직을 두루 거쳤는데, 내직으로는 성균관의 전적, 직강, 사예와 익위사의 익찬 및 5조의 좌랑과 3조의 정랑이 되었다. 또 삼사(三司)에 들어가서 정언, 수찬, 부교리, 교리, 지평, 장령 등을 하였다. 또 정3품 벼슬인 장악원 정, 사옹원 정, 사섬시 정을 거쳐서 통례원 우통례에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통례원은 임금을 만나는 절차나 제사 사무를 맡은 관청이었다.

외직으로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도사와 초계와 영천의 군수를 거쳐서 성주 목사에 이르렀다. 무릇 44차례나 벼슬을 옮겼다.

그리고 사신(1603)으로 중국 명 나라에 가서 문장가로서 이름을 날렸고, 5대 사고를 만드는 일(1606)에도 참가하였다. 간신배 이이첨을 제거하기 위한 상소를 올리다가 오히려 엄중한 견책을 받기도 하였다. 학문을 일으켜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여 당시 10대 시인과 36대 문장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초서와 예서를 잘 썼고, 일할 때에는 절대로 남을 속이지 않았다. 1631년(인조 9)부터 몸이 쇠약해져서 하금곡리 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정구, 김륵, 유성룡, 김광엽 등과 서로 사귀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당시 문장과 선행이 영남 유림의 으뜸이 되었다.

무덤은 예천읍 용산리 제동(堤洞)에 있고, 도승지(1650)에 증직되었다. 하금곡리 유전동(柳田洞)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예천읍 생천리의 정산서원(鼎山書院)에 제향되었고, 문집이 있다. 김응조(金應祖)가 시로써 이광윤을 추모하기를, "바른 붓은 간신배를 쫓았고, 맑은 글은 나라를 빛내었네. 어짐으로 백성을 건졌고, 풍속을 바꾸어 학교를 일으켰네... 죽지 않고 길이 남을 것은, 영원한 그의 꽃다운 이름이도다."라고 하였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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