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제목김복일(金復一, 청렴 강직하게 벼슬을 한 조선 국립대학 교수)
작성자관리자 @ 2004.07.31 18:51:57
김복일(1541-1591)은 용문면 죽림리 남악골(南嶽洞) 사람으로,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 본관은 의성, 진(璡)의 다섯 째 아들, 학봉 김성일의 동생, 퇴계 이황의 제자이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가 되고, 1570년(선조 3)에 식년 문과에 예천사람 김대명, 노전, 정윤우와 함께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1575), 박사(1579), 전적을 거쳐, 형조 좌랑(1580)을 시작으로 호조 좌랑, 공조 좌랑을 지내고, 호조 정랑(1583)에 올랐다.

전라도 어사로 나갔을 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부린 전주 부윤이 김복일의 소문만 듣고 스스로 벼슬을 그만 둘 정도로, 김복일의 청렴 강직한 성격이 알려져 있었다. 그 후 강원도 도사(1584)를 거쳐 울산 군수(1587)로 부임 중에는, 왜구의 노략질을 뿌리치고, 백성을 아끼고 멸사 봉공하는 청백리의 모범을 보여, 울산 군민이 세운 송덕비가 지금도 울산향교 뒷들에 서 있다.

관찰사가 권세가에게 바칠 뇌물을 요구하므로, "어진 백성의 가난한 재물을 긁어다가 살찐 세도가를 더욱 부자 되게 할 게 무어냐"라고 하였으며, 또한 관찰사가 울산에 사람을 보내어 토산품을 거두어 가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을 잡아 가두고, 그 이유를 관찰사에게 보고하니, 관찰사가 겉으로는 좋은 척하고 속으로는 분히 여겨 최상위로 보고한 업무평가보고서를 다시 찾아와 최하위로 고쳐서 올리기도 하였다.

김복일의 화살같이 곧고 대쪽같이 바른 마음을 모두 걱정하더니, 과연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곤궁 속에서 지냈다. 한강 정구와 오리 이원익도, "지금 세상에 다시는 그런 사람이 없다."라고 칭찬했고, 선조 임금도 김복일의 청렴 강직한 성격을 듣고 감탄하여 <문헌비고>, <성리대전>등의 책을 하사하였다.

김복일은 그 후 창원 부사, 경주 교수, 지금 국립 대학인 성균관의 사예(1590)와 종3품인 사성(司成)에까지 벼슬이 오르고, 풍기 군수로 벼슬을 그만 두었다.

죽림리에는 가학루(駕鶴樓)라는 집을 짓고, 그 옆에 남악정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부인은 죽림리 대수마을의 권오상(權五常)의 손녀이고 무덤은 용문면 내지리의 용문산에 있다.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과 다인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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