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제목[인물7]두운(杜雲, 용문사 창건한 통일신라 때 고승)
두운은 통일신라 말기 용문면 두천리 조가집골 출신으로, 속성(俗姓)은 신(申)씨이다. 어려서 범일 국사와 함께 황해를 건너 중국 당 나라에 가서 불경을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가까운 용문면 내지리에 조그만 초막을 짓고(870년) 창기사(昌期寺)라 하면서 혼란한 국가의 평안을 기원했다. 그 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치기 위해 안동으로 내려가던 길에 창기사(昌期寺)에 들렀다(930년 1월).
왕건이 두운 선사에게 이르기를, "나는 왕건이라는 사람인데, 당대의 고승 두운 선사께서 이 곳에 머무르신다 하기에 뵙고자 오다가 절 밖에서 청룡 두 마리가 길을 인도하여 이 곳에 이르렀으니 부디 선사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두운이 이르기를, "사람의 목숨이 덧없기는 산골짝을 흐르는 물과 같아서 오늘은 비록 살아 있으나 내일을 보장하기 어렵거늘, 그대는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 하느냐."라고 하여 왕건의 청을 거절하니, 왕건이 재삼 간곡히 부탁하기를, "무엇 때문에 스님이 되셨습니까? 지금 이 혼란한 시국에 백성을 건질 수 있는 스님의 지혜를 저에게 빌려주소서."라고 하였다.
부처님께 대한 기도와 수련에만 전념하던 두운 선사도 왕건의 간곡한 청을 끝까지 뿌리칠 수 없어 절 이름을 용문사(龍門寺)로 고치고, 후삼국 통일에 큰 공헌을 하였다. 두운 선사는 예천의 용문사 외에도 상리면 명봉리의 명봉사(鳴鳳寺), 남해의 용문사, 풍기 희방사를 창건하였고,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도 중건하였다.
두운 선사의 명에 따라 지었던 두운암(杜雲庵)이란 암자가 용문사의 동북쪽 끝에 있었는데, 승려들이 거처하다가 1984년에 허물어졌다.
또 용문사 경내 진영당(眞影堂) 안에 두운 선사의 초상화가 다른 고승들의 영정과 함께 베 바탕에 채색화로 그려져 있다. 두운 선사가 창건한 용문사는 호국 불교의 도장으로 이용되어 왔었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고향에서 가까운 용문면 내지리에 조그만 초막을 짓고(870년) 창기사(昌期寺)라 하면서 혼란한 국가의 평안을 기원했다. 그 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치기 위해 안동으로 내려가던 길에 창기사(昌期寺)에 들렀다(930년 1월).
왕건이 두운 선사에게 이르기를, "나는 왕건이라는 사람인데, 당대의 고승 두운 선사께서 이 곳에 머무르신다 하기에 뵙고자 오다가 절 밖에서 청룡 두 마리가 길을 인도하여 이 곳에 이르렀으니 부디 선사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두운이 이르기를, "사람의 목숨이 덧없기는 산골짝을 흐르는 물과 같아서 오늘은 비록 살아 있으나 내일을 보장하기 어렵거늘, 그대는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 하느냐."라고 하여 왕건의 청을 거절하니, 왕건이 재삼 간곡히 부탁하기를, "무엇 때문에 스님이 되셨습니까? 지금 이 혼란한 시국에 백성을 건질 수 있는 스님의 지혜를 저에게 빌려주소서."라고 하였다.
부처님께 대한 기도와 수련에만 전념하던 두운 선사도 왕건의 간곡한 청을 끝까지 뿌리칠 수 없어 절 이름을 용문사(龍門寺)로 고치고, 후삼국 통일에 큰 공헌을 하였다. 두운 선사는 예천의 용문사 외에도 상리면 명봉리의 명봉사(鳴鳳寺), 남해의 용문사, 풍기 희방사를 창건하였고,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도 중건하였다.
두운 선사의 명에 따라 지었던 두운암(杜雲庵)이란 암자가 용문사의 동북쪽 끝에 있었는데, 승려들이 거처하다가 1984년에 허물어졌다.
또 용문사 경내 진영당(眞影堂) 안에 두운 선사의 초상화가 다른 고승들의 영정과 함께 베 바탕에 채색화로 그려져 있다. 두운 선사가 창건한 용문사는 호국 불교의 도장으로 이용되어 왔었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