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제목권오기(權五紀, 항상 백성 소리에 귀를기울인 좌통례)
권오기(1463-1533)는 용문면 하금곡리 오룡골(五龍洞) 출신으로, 자는 협지(協之), 호는 졸재(拙齋), 본관은 예천, 선(善)의 둘째 아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다.
1486년(성종 17)에 형 오행(五行), 동생 오복(五福)과 더불어 진사가 되고, 1495년(연산군 1)에 증광 문과에 을과로, 예천군수 문경동과 함께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서 예문관 검열에 임명된 후 봉교로 승진하였다.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하면서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벼슬이 사헌부 집의(執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무오사화(1498) 때 동생 오복이 사형을 당하자, 권오기는 해남에서 8년여 유배 생활을 하였다. 중종반정(1506)으로 풀려나 성균관 전적에 기용되었다. 그러나 늙은 부모 가까이 있기 위해 지방관으로 내려가 충주 등 6읍의 골원을 맡아 잘 다스렸다. 그 후 사헌부 지평(1511)에 임명되었다.
1512년(중종 7) 1월 19일에 지평 권오기가 왕에게 아뢰기를, "제가 아프신 아버지를 뵙기 위하여 고향에 다녀왔는데, 고향에서 들으니 경상도 관찰사 송천희(宋千喜)가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데 안간힘을 다했다고 합니다. 송 관찰사의 임기가 오는 음력 3월이면 끝나는데, 이 때가 백성들의 식량이 떨어질 때이므로, 경상도 백성들이 보리, 밀이 수확될 때까지 임기를 연기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경상도에서 세금 바치는 충주 가흥창(可興倉)의 됫박의 크기가 기준보다 더 크다고 백성들이 원망하므로 고쳐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다.
그 후 경상좌도 군적 경차관(1526), 사도시 부정(1530)을 거쳐 정3품인 통례원 좌통례(左通禮)에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무덤은 예천읍 생천리 신골 혜원동에 있고, 하금곡리 계금자 마을의 인산(仁山)서원에 제향되었다.
권오기는 태도가 단정하고 성리학에 깊이 통달하여 선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유성춘(柳成春), 최산두(崔山斗), 윤형(尹衡) 등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시켰다. 문집이 있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1486년(성종 17)에 형 오행(五行), 동생 오복(五福)과 더불어 진사가 되고, 1495년(연산군 1)에 증광 문과에 을과로, 예천군수 문경동과 함께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서 예문관 검열에 임명된 후 봉교로 승진하였다.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하면서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벼슬이 사헌부 집의(執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무오사화(1498) 때 동생 오복이 사형을 당하자, 권오기는 해남에서 8년여 유배 생활을 하였다. 중종반정(1506)으로 풀려나 성균관 전적에 기용되었다. 그러나 늙은 부모 가까이 있기 위해 지방관으로 내려가 충주 등 6읍의 골원을 맡아 잘 다스렸다. 그 후 사헌부 지평(1511)에 임명되었다.
1512년(중종 7) 1월 19일에 지평 권오기가 왕에게 아뢰기를, "제가 아프신 아버지를 뵙기 위하여 고향에 다녀왔는데, 고향에서 들으니 경상도 관찰사 송천희(宋千喜)가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데 안간힘을 다했다고 합니다. 송 관찰사의 임기가 오는 음력 3월이면 끝나는데, 이 때가 백성들의 식량이 떨어질 때이므로, 경상도 백성들이 보리, 밀이 수확될 때까지 임기를 연기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경상도에서 세금 바치는 충주 가흥창(可興倉)의 됫박의 크기가 기준보다 더 크다고 백성들이 원망하므로 고쳐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다.
그 후 경상좌도 군적 경차관(1526), 사도시 부정(1530)을 거쳐 정3품인 통례원 좌통례(左通禮)에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무덤은 예천읍 생천리 신골 혜원동에 있고, 하금곡리 계금자 마을의 인산(仁山)서원에 제향되었다.
권오기는 태도가 단정하고 성리학에 깊이 통달하여 선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유성춘(柳成春), 최산두(崔山斗), 윤형(尹衡) 등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시켰다. 문집이 있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