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제목[금당실인물3]이유인(李裕寅, 항일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법부대신)
이유인(?-1907)은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99칸의 집을 짓고 근처에 솔밭(松林)을 가꾸었던 사람으로, 호는 희재(希齋), 본관은 경주, 유태(裕泰)의 형이다.
임오군란(1882) 때 민비의 환궁을 점친 무당 진령군의 추천으로 양주 목사에 첫 부임하고, 뒤에 대신으로 영달해서 '양주 대감'이라 한다.
무과에 급제하여 1888년(고종 25)에 파주 목사로서 전무(電務)위원이 되어 경기, 황해도 전기 가설에 공헌했고, 1897년(광무 1)에 덕수궁을 중수하는 책임을 맡았고, 황제 대관식을 거행할 때에, 천주교 신자로서, 또 한성 판윤으로서, 프랑스 사람 뮈텔 주교를 왕에게 소개하여 국호 대한제국과 연호 광무의 제정을 돕게 했다.
1898년 1월 21일에 법부(法部) 대신이 되었으나 그 해 6월에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그 해 8월 23일에 체포되었는데, 법부대신 당시 황제의 칙서를 위조하여 이대준을 시켜 부산항으로 새로 부임하는 러시아 공사에게 보냈다는 죄로 사형 선고되었다. 그러나 10년 유배형으로 감면되어 고금도에 갇혔다가 그 이듬해인 1899년 1월 초에 풀려나 경무사(警務使)에 기용되었다. 이 때 서울 시민이 지켜야 할 사항 7조목을 고시하고 위반자를 공정히 처리한 공으로 1899년 8월에 궁내부 특진관으로 승진했다. 1900년에는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예천에서 향약을 직접 제정하여 실시하도록 했으며, 1901년 8월에는 지보면 마전리 구마전에 선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1904년(광무 8) 6월 중순에는 대한보안회(大韓保安會)를 조직하여 그 부회장이 되었고, 곧 회장이 되어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철회를 위해 군중을 동원 일본 공사를 만나 항의하며 일본측의 요구를 철회시켰다. 그리고 1906년 공진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 후에도 왜경의 눈을 피해 항일 운동을 계속하다가 1907년에 김해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 밀양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왜경이 보낸 의사의 진단은 경기(驚氣)로 인한 뇌막염이었다고 하였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
임오군란(1882) 때 민비의 환궁을 점친 무당 진령군의 추천으로 양주 목사에 첫 부임하고, 뒤에 대신으로 영달해서 '양주 대감'이라 한다.
무과에 급제하여 1888년(고종 25)에 파주 목사로서 전무(電務)위원이 되어 경기, 황해도 전기 가설에 공헌했고, 1897년(광무 1)에 덕수궁을 중수하는 책임을 맡았고, 황제 대관식을 거행할 때에, 천주교 신자로서, 또 한성 판윤으로서, 프랑스 사람 뮈텔 주교를 왕에게 소개하여 국호 대한제국과 연호 광무의 제정을 돕게 했다.
1898년 1월 21일에 법부(法部) 대신이 되었으나 그 해 6월에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그 해 8월 23일에 체포되었는데, 법부대신 당시 황제의 칙서를 위조하여 이대준을 시켜 부산항으로 새로 부임하는 러시아 공사에게 보냈다는 죄로 사형 선고되었다. 그러나 10년 유배형으로 감면되어 고금도에 갇혔다가 그 이듬해인 1899년 1월 초에 풀려나 경무사(警務使)에 기용되었다. 이 때 서울 시민이 지켜야 할 사항 7조목을 고시하고 위반자를 공정히 처리한 공으로 1899년 8월에 궁내부 특진관으로 승진했다. 1900년에는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예천에서 향약을 직접 제정하여 실시하도록 했으며, 1901년 8월에는 지보면 마전리 구마전에 선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1904년(광무 8) 6월 중순에는 대한보안회(大韓保安會)를 조직하여 그 부회장이 되었고, 곧 회장이 되어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철회를 위해 군중을 동원 일본 공사를 만나 항의하며 일본측의 요구를 철회시켰다. 그리고 1906년 공진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 후에도 왜경의 눈을 피해 항일 운동을 계속하다가 1907년에 김해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 밀양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왜경이 보낸 의사의 진단은 경기(驚氣)로 인한 뇌막염이었다고 하였다.
<장병창 예천신문 논설위원 >
